2006년 12월 말 종무식 후 쓴적이 없었으니
아마 이전글은 또다시 지워졌을 듯...
여기 이리 글을 올리는 이유는 아마 다른 햏자도 많이 그러듯이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오.
2년동안의 제정신 박히지 않은 상사들이 득실한 공사현장에서,
죽었다 생각하고 머리빠지도록 일하였건만,
남는건 인식차이에서 오는 견제성 팀 해체와,
연봉동결과 낮은 인사평가 밖에 남지 않더이다.
준공이 가까와오면서 이제 다음 현장은 지방이라 하더이다.
이젠 정말 여길 벗어날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되도 않는 건설사와 유통사에 넣은 서류만도 수십군데.
예전에 느꼈던대로 경력직 지원은,
서류전형조차 통과되지 않더이다.
해체된 팀에서 새로운 팀장, 팀원에게로,
또다시 입맛을 맞추고 호흡을 맞춰야 하는건,
입사를 새로한 것 같았소.
더군다나 이전 현장에서 우리팀을 해체시키려 노력했던,
그래서 서로 \'적\'이었던 팀 아래로 들어가 일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괴로웠소.
하지만 세월이 상처를 무디게 한다고,
차츰 나 자신도 이 생활에 흡수당하고 있었소.
그러던 어느날, 지인의 도움으로 자기네 직원을 뽑는다는데 지원하라 하였소
그곳은 10대 건설사중 한곳이었소...
지원서를 내고, 공격적인 질문을 정신없이 수비하는 면접도 통과하였소...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말, 드뎌 전화가 걸려오더이다.
그런데 그 전화는 결코 반갑지 않은 전화였소.
아주 건방진 말투로,
\'채용키로 했습니다. 그런데 과장은 안되고 대리3년차로 밖에 안되겠네요. 싫으시면 입사포기하실 겁니까?\'
전화주인공은 면접진행에서 본 나이 얼마 안된 직원이었는데, 10대 건설사의 \'오만방자\'라고 해야할까...
난 굳이 과장은 아니고 그저 다시한번 협의해 달라 부탁했으나 이틀 후 대답은 \'노\'였소.
그리고 빨리 입사포기하라 재촉하더이다.
그래서 나도 \'노\'하고 포기했소...ㅜㅜ
난 여지껏 손해보며 직장을 옮기는데 익숙했으나, 이상하게도 그날은 오기가 발동하더이다.
물론 지금 여기보단 600만원의 연봉 상승과 뽀대나는 그룹뺏지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날 대답은 \'노\'라고 나오더이다.
그러고 나서 찬찬히 생각해 보았소.
내 경력은 10년이었으나, 이 직장에서도 난 대리3년차로 다니고 있던게 아니었던가...
내가 아닌 남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내 위치를 난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가.
한동안 심각하게 방황하고 후회하였으나,
내 전공으로 가는 새직장도 아니어서, 아마 또 다른 고민이 있었을 거라 위로하고 있소.
그리고 변치않는 중요한 원칙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하였소...
첫번째는 나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
두번째는 감정적인 결정은 항상 후회를 한다는 것,
세번째는 중요한 결정은 항상 여러사람의 의견을 듣고 결정해야한다는 것,
네번째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
찾아오는 기회든, 만들어내는 기회든, 또다시 찾아올 거라고 믿으며 또 하루를 보내오...
*첨부는 지워진 이전의 글들이오... 다른 의미는 없고 그저 내 바보같은 경험을 알려 다른 이들께 느끼는 바를 조금이라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오...
*나의 직장취업기
여기 올라오는 글쓴 분들을 보고 나도 뭐 내세울 것 없는
소시민이지만,
내가 취업했던 여러 회사와 생활,그리고 그만두게 되는
과정등을 한번 남겨봐야 하겠단 생각이 들었소...
둘러보니 대기업이니 외국기업이니 많지만,
대한민국 직장인 모두가 대기업 다니는 건 아니지 않소.
난 그룹사 문턱은 몇번 가보았지만,
실력이 안되선지 운이 없었던지 실패로 끝났소.
하지만 그동안의 세월을 후회하는 건 아니오.
이리 글을 올려보는 이유는
아침에 출근을 하다 메트롤보니,
한가지 일이 숙련되는데 10년이란 세월은
투자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문득 내가 살아온 기간을 돌이켜보게 되었소...
년차로는 9년차, 경력은 8년째가 시작되는 나의 세월.
98년부터 시작된 직장생활을 10년이 되기전에
나 자신이 한번 돌이켜 봐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모두가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듯
나 자신도 그리 평탄치 않은 직장기를 보내왔다고
느꼈기 때문이오.
생각을 좀 정리해보고,
내일부터 부족한 글을 써볼까 하오...
나의 직장취업기2- IMF 일년차
또 서론 몇자 적다 전부 지우고
1998년 이야기를 시작할까 하오.
1998년.
떨어질 줄 모르던 아파트들도 휘청거리던 IMF 일년차.
하지만 난 그래도 이 바닥에선 알아주는 대학의 소위 잘나가는 학과를 다니고 있다는
알량한 자부심이 있었소...
그러나 대학 졸업반의 8월이 되고 9월이 지나가건만
해마다 9,10월이면 학과 게시판에 빼곡히 나붙던
각종 대기업(이때만 해도 대기업은 각종에 포함되었소)
인턴사원 채용전단이,
-그때 인턴사원의 개념은 월급적게 주고 일 부려먹다 짜르는 지금의 인턴관 전혀 달랐소.-
내가 다니던 학과가 개설된지 25년만에 처음으로
\'아무것도 없었소\'
종이 쓰레기만 바람에 나뒹구는 텅빈 학과 복도벽...
어느날 텅빈 머리로 학교를 어슬렁거리고 있을때,
학과벽에 붙어 있는 딱 한장,
\'OO방송 인턴사원 채용공고-1명\'
내 전공관 좀 달라 관심이 없었지만,
\'그냥 한번 경험삼아...\'지원 했소.
면접날 아침, 소개받고 내정되어 면접보러가는 선배가 있어
더욱 부담없이 가벼웁게 2시간 거리를 지나
바닷먼지 냄새가 느껴지는 방송국에 도착했소.
아, 도착직전 고가도로 오르는 버스안에서
면접때 무얼 물어볼까 잠깐 생각해 봤소.
일단은 왜왔냐 왜 선택했냐가 가장 큰 물음일 거 같아...
\'건축과 인테리어는 수십년,수개월동안 감각과 아름다움을 빛낼 수 있는 시간의 기회가 있지만, 무대는 카메라가 스쳐지나는 단 몇분, 몇초라는 짧은 시간에 다른 분야의 수십년의 긴시간을 압축해 스펙트럼처럼 보여주는 것이라고...\'
IMF 일년차,
난 이미 합격해 있었소.
나의 직장취업기3- 서러운 인턴사원
요즈음 회사에서 삽질을 하고 있소.
삽질 시작한지는 한 3달 됐는데,
한달 정도 쉬다
또 똑같은 삽질이 시작됐소.
내가 열받는건, 야근보다도, 전부터 이 삽질이
다시 시작될 것을 예견해 왔고,
누차 개진하였지만, 그걸 막지 못했단 거요...
물론 회사는 불행히도 대리가 삽질을 안할 수 있도록
예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진 않소.
의견만 말할 뿐...
다시 1998년으로 돌아가 보겠소.
5시간의 지리한 지하철+버스통근시간도
졸업반 중 최초로 취업문을 뚫은 쾌감에 짠 바닷바람도
살랑거리듯 느껴졌었소.
그때...나의 한달 급여는 60만원이었소.
세금을 제하고 나면 50만원이 되던가 안되던가...
하지만 그땐 젊고 순진했소. 그리고 IMF 였소.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고...밤도 새고
(물론 야근/초과 수당 없소)
받는 돈은 적었지만 고된 근무는 아니었고, 무대디자인도
할만한 일이더이다.
방송국은 특이한 직급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팀장(차,부장급)이하 팀원들은 직급이 없는 거였소.
21살이나 34살이나, 모두 사원-선후배였소...
짧은 시간이라 그리 친하게 지내진 못했지만,
자유로운 분위기는 첫 직장이었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소.
무엇보다 그 곳 팀장이 너무나 존경할 만한 분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회사에서의 말투, 태도, 사고방식, 일하는 방식이외에
너무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소...
그러나...내 머리 속 깊숙한 곳에서는
이게 아닌데...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소.
한달 60만원이라는 적은 봉급, 5시간에 달하는 통근시간,
인테리어를 해야 한다는 어줍잖은 꿈...
1999년 3월, 인턴기간이 끝나고 인사 테이블에 앉아
내가 듣는 말은,
\'계약직으로 받아줄 수 있고, 월급은 변함없다\' 였소.
60만원, 그 돈은 노동부에서 고용장려를 위해서 보조금이 포함된, 회사는 30만원만 부담하면 회사의 세금부담도 덜어주는...난 30만원 짜리 회사원이었다는 것을 5달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가닥 희망을 걸고 다녔건만,
허사였소.
초년생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한게 아니었던 거요.
정직원 취직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팀장의 미안해 하는 눈길을 뒤로하고,
난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랐소.
이제부터 나의 고난은 시작된 거요.
나의 직장취업기4- 기댈곳은 없다
30만원짜리 회사원을 그만둔 후, 난 선배에게 연락이 닿아
강남역 외국계 사무실로 찾아가게 되었소.
말끔하고 부드러운 인테리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카드키...
강낭콩처럼 생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미팅을 가졌소.
\'내 논문을 좀 도와주고, 논문 끝나면 부를테니 일단 내가 소개시켜 주는 F사에 가 있어라\'
한낮의 국회 도서관이란 곳을 처음 가보았소.
공부하는 사람인지...책 베끼러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에도 사람이 득실거리더이다.
이때 나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10시~12시 : 국회도서관, 13시~23시? F사 사무실.
F사는 5명 남짓한 작은 인테리어 회사였소.
월급은 70. 10만원 올랐소?
분위기는 사람이 없어 모를 지경이었소.
난 사람수도 적은 회사가 왜 이리 자리 주인들이 오랫동안 오지 않는지 그땐 별 감이 없었소.
남의 논문 쓰랴, 사무실에선 캐드하랴...
3개월이 되는 1999년 6월...
드뎌 논문을 완성하게 되었소. 근데 선배의 말,
\'너 여기(F 사)일하는거야\'
F사는 선배회사의 하청업체가 되려고 날 받아준거고, 선배도 밥 한번 사주지 않고
논문을 완성하게 된거요.
선배는 논문을 완성하자 F사 사무실로의 연락을 끊었고,
선배와 수억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고생한 나를 포함한 F사 사람들은
\'닭 쫒던 개\' 였소.
이제 난 현장기사가 되었소.
무릇 기사란 집에 가면 안되오.
잠을 자서도 안되오.
요새 인테리어 회사는 기사고 주임이고 자기 손에 먼지 한번 안 묻히는 일이 많아지지만,
그땐 모든 시공을 할 수 있는 만능인이 기사였소.
아마 지금 인테리어 회사의 시공 과차장급 이상은 정말 인정해 줘야 하오...
철거에서 자재운반,벽체시공,무늬목시공,바닥시공,조명설치,준공청소까지.
무더운 7월 새벽 4시. 군포의 한 은행에서 일주일동안 같은 옷을 입고 땀에 절어 쓰러져 있던 나는,
그날 회사를 안가기로 했소...
그 다음날도 안갔소...그리고 그 다음날도...
나의 직장취업기5- 막장에서
문래동의 스튜디오로 직원 뽑는걸 어떻게 알고 찾아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소.
무대가 아닌 인테리어를 하고 싶다던,
나의 생각을 내 스스로 번복하는 오류를 저지르며,
바퀴벌레 기어가는 지하 사무실에서
CF,뮤직비디오 무대촬영을 주로 하는 곳의 실장을 만나고 있었소.
\'그래, OO방송 다니다 그만뒀다고?\'
\'무대 일은 잘 알겠네... 짧은 시간에 일을 많이 해봤으니 잘할꺼야\'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실장은,
3달동안 나에게 무대가 재미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소.
그 바닥에서 나름대로 발이 넓어
클라이언트,광고 대행사,제작사들이 모이는 회의 참여에서부터,
국내 유수의 광고,뮤직비디오 제작사들을 돌아다니며,
당시 한참 제작 중이던 원더풀데이즈나
감독/조감독등과 연예인들... 많이도 보았소.
혹시 뿌셔뿌셔 CF 아시오?
내가 이곳에서 처음 한 무대였소...
도면치기-무대의 도면은 사뭇 다르다오...아직도 승,치,자...뭐 이런 단위를 쓰오
3D하기-무대는 인테리어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다오
협의하기-광고제작사들, 주로 조감독들
소품준비...또 세트 만드는 거 (노가다) 돕기...
실장은 다른 사람에게 인간적인 면이야 어쨌든
자기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었고, 배울 점도 있는 사람이었소.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광고 제작인들과 난 어울리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오. 그들의 사고방식, 생활방식.
유행의 첨단을 달리고 외국 껏을 고대로 베끼기를 많이 하는 것도 그럭저럭 넘길 수는 있으나,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직업인듯 하오이다.
영화판과 동일하다 보면 되오.
난 여기서 하나의 시스템을 보게 되는데,
갑이 클라이언트(사장) 혹은 홍보팀, 을이 대행사,
병이 제작사, 그 다음 정이 나였던 거요.
이때부터 난 갑을 가기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소.
갑과 그 이하의 차이는, 일을 덜하고 더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방향과 의견을 불어 넣을 수 있느냐의 차이였소.
결혼을 생각한 시점에 매일 아침 6시에 퇴근 할 수는 없었고,
무대제작스텝(좋게 말해서)에게 더 이상 선배라고
부를 수는 없었소.
난 그들과 다르고, 달라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오.
그리고 이런 생활을 받아들여 커나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런 생활을 바꾸는 반전을 택했소.
추석을 앞둔 어느 한밤... 난 예전 OO방송에 있는 회사선배에게 전화를 걸었소.
SOS였던 거요.
내 말이 나오기도 전에,
\'팀장님이 그만두신지 얼마 안되서 인원이 필요한데 김횽씨가 잘 전화해 줬네\'
팀장은 다른 직원들에 대한 인사문제
(또 회사의 정직원 안받아들이기)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겠다\'하다 정말 나가시게 됐다 들었소.
에어콘 꺼진 150평 스튜디오안에서 난 마지막 세트를 세우고 있었소.
나의 직장취업기6 - 갑을 향하여
한동안 안 쓰다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글을 올려보오.
다시 OO방송국에 들어가게 된 것 까지 쓴 거 같은데...
뭐 이런 글 보는 햏들께서 SPOT으로 읽는 것이니
지난 얘긴 그렇다치고
그냥 써야겠소. 과거사가 궁금하믄 검색을 추천.
그렇게 하루 24시간 노동에서
OO방송의 무대디자이너로 복귀해보니...
하고 싶었던 게 너무나 많았소...
그리고 시간도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갑이란 것이 그런 것이오...
업체라 불리우는 (업체 입장에선 기분 나쁘시겠으나) 곳에선
갑이 실실거리고 놀기만 할 뿐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오.
그리고 방송국 무대디자이너라는게 누가 대신 디자인을 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을은 바로 노가다요)
이상적인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소...
하지만 공중파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봉은 턱없이 적었고,
난 그저 도피처로 아무생각없이 여기 들어와 있었소.
이런 나를 받아준 선배에게 정말 경의를 표하오...
방송국 무대디자이너는 전국적으로
인원이 매우 적은 편에 속하고
그들만의 회합 등등의 모임이 있다오...
그래서 타 방송사의 무대디자인을 해준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고
방송국이 달라도 서로 선후배 이런 식으로 불리더이다.
전에 그만둔 팀장이 청담동에 회사를 만들어 나를 부를때까지
이곳에서 일년 반 쯤 생활하였소...
당시 만들어 졌던 회사는 무대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서
아마 국내에 몇 안되는 회사였소...왜 별로 없었냐 하면 별로 돈이 안됐기 때문에
수가 워낙 없었지만 용감하게도 회사를 만든거요...
나야 그 팀장을 존경해마지 않았기 때문에 갔지만,
작은 회사라는 게 다 그렇지않소.
더군다나 영화/뮤직비디오 무대를 주로 하고 곁다리로
인테리어까지 손을 대며
점점 내 생활이 없어져 갔소...
내 생활이 없어질 수록 커리어는 엄청 쌓이더이다.
회사가 아닌 개인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입이 적기 때문이고,
직원을 두기보다 알바로 전부 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소.
세월이 더 가기 전에 큰 회사로 가길 원했고,
마침 공중파 방송국에서 무대디자이너 채용이 있어
일산으로 실기시험을 보러 갔었다오...
1차 면접에 솎여진 사람들이 실기를 보러 왔는데,
교실 같은 곳에 60여명씩 들어가서 시험을 봤었소...
그게 한 3반 정도 되니까...
200명 정도 였다고 보오...
신입사원 채용이었는데, 난 경력이 있지만 신입으로 지원하였소...(많이들 그러지않소^^;)
수백의 경쟁을 뚫고 20명 정도의 1차 면접&실기 PT 에서도
통과하여
남은 사람은 나와 또 한사람. 둘 뿐이었소...
이친구는 H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있다 그만뒀다는데,
-나 같으면 절대 그만두지는 않았을 것이오-
붙을지 않붙을지도 모르는데-그 의문은 곧 풀리오.
두명 남고 면접 기다리는 시간에 쪼금 되보이는 방송국분이 와서 그러더이다.
자네 X대 나왔지? - 예
방송국에 X대 사람 선배 없는 거 알지? - ......
젠장. 애초부터 들러리로 뽑을 것을 모하러 최종면접 두명 까지 뽑아놓고
그딴 소릴 하는지...
면접도 황당했소...사장면접이었는데,
내일부터 노조가 파업을 강행하기로 하여 모든 세트도
안세우기로 했다.
넌 어떻게 할거냐?
뭐 이런 질문에서부터...
난 일산에서 돌아와 있었지만 이젠 청담에서 일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소.
2001년 겨울, 난 다시 다른 곳을 준비하고 있었소...
나의 직장취업기7- 다다익선
이글을 쓰며 여기가 디씨이니
내 디카기변기도 한번 외전으로 삽입할까를
항상 생각해왔는데,
여태까지 짧게 짧게 올려왔으니
그냥 서론으로만 언급하고 넘어가려 하오.
내가 디카를 접하게 된건 취업시작과 동일하오...
1998년 OO방송 미술팀에서 구입한 COOLPIX 900을 처음 사용하였소.
아마 니콘의 꺾는 디카의 최초모델로 기억하오.
그 당시 가격은 140만원인가 했었다오.
배터리는 AA를 썼고(엄청 빨리 나갔다오),
몇년 후에야 알았지만
100만 화소도 안됐던 것으로 아오.
하지만 이 디카로 디씨도 알게 되고,
여태까지 관람자만 하다 꽤나 장문의 글도 올리게 되었으니...
쿨픽스900을 시작으로
후지 MX4700Z~소니S70~캐논G2~익서스V2~삼성알파5~
콘탁스SL300RT*~i4R~펜탁스 istDs~익서스65
방송 스튜디오안에서, 새벽 CF촬영 현장에서, 뮤직비디오 조명 뒤에서,
땀에 절었던 강남역 음식점 현장에서,
먼지 걷히는 아침 수많은 백화점 인테리어 현장에서,
지금도 이중 5기가 떠나지 않고 자릴 지키고 있소...
이젠 건축공사 현장에서...
이중 애착이 가는건 SL이오...역시 나이가 들면서 아날로그적인걸 좋아하게 되나보오...
서론은 이쯤하고,
1998년으로 시작된 1기의 생활이 2001년 겨울에 2기로
접어들게 되오...
꽤 전통있는, 패션 기업에 입사를 하게 된 거요.
내가 청담회사를 그만둘 때, 팀장이 그러더이다.
\'김횽씨는 아직 젊으니까 큰 곳에 가서 여러 사람들을 경험하는 게 좋아. 잘할꺼야\'
입사과정은 서류-적성검사-면접/포트폴리오 순이었소.
경력자로 지원하였지만, 무대디자인을 주로 하고
인테리어에 대해선 솔직히 내세울만한 경력은 없어 입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소.
그저 태도를 똑바로 하고, 모르면 대놓고 모른다 하고.(이때 살짝 위험하긴 했소...건축법규를 물어보길래)
그래도 그간 3년간 커리어를 잘 정리한 포트폴리오 덕분에 뽑혔을 거라 생각하고 있소.
첫술에 대기업 들어갔던 햏들은 이해하지 못할 지 모르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 방송국 무대디자이너-인테리어 기사-
세트맨?-무대디자인 전문회사...3년만에,
임직원 2천 5백의 중견기업 인테리어 담당이 된거요.
나름대로 사원연수도 하고, 식당도 있고...
분위기도 좋고, 적자가 좀 나는 것과 사원/대리 사이에 주임이란 직책있는 거 빼면 다 좋았소.
나는 주임 1호봉이었던 거요...
3년 후 대리...대기업은 대개 입사 후 3년이면 대리 아니오?
여기선 졸업 후 6년만에 대리를 단다는 게 씁쓸하긴 했소.
연봉은 중소기업이 다 비슷한 수준이고...
하여간 3년이 지나 대리를 달 때까지 전국의 도시를
밤낮으로 누비며,
나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배울 건 배우고 싸우고 협력하고,
같이 친해지고...좋은 경험이었소.
그런데 백화점 컨펌을 다녀보니,
갑위의 갑이 있더이다...브랜드의 갑은 백화점이 아니겠소?
대리 1년차,
옮기기도 쉽지 않은 차에 위기가 닥치더이다...
구조조정에 우리팀에서 한명이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었소.
시간이 지나면서 팀 분위기도 좋지 않아 졌고,
내가 그만두게 되었소...
인터넷 무명에서도 쓸글이 있고 안쓸사연이 있고
다 그런게 있지않소?
갈 곳도 안 정해진 2005년 4월,
그때 난
세차게 바람부는 들판에 나 혼자 서있는 느낌이었소.
또 다시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해야하는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가...라고.
나의 직장취업기8 - 나는 일하고 싶다
연휴다 뭐다 해서 놀러간 분들께는 좀 그렇지만,
비오니 시원해서 좋소.
사무실 일도 별로 없고...
휴일 끝나면 바쁠테니 이리 써두는 게 나을까 싶어
짬내서 올리오.
오늘은 서론으로 꿈에 대해 얘기할까 하오.
내가 대학 4년, 군대 3년, 사회 9년 동안
꿈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다행히도 크게 벗어나진 않은 걸 행운이라 생각하오.
그런데 요사이 드는 생각은,
꿈은 그냥 명제고,(예를 들어 사람을 사람이라고 하듯)
그 꿈도 방향과 방법이 수만가지가 있어
그것을 신중히 선택하지 않으면
나의 꿈에 신물을 느껴 다른 꿈을 생각하게 되는,
힘든 결정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오.
쉽게 말해
꿈을 이루는 것이 \'일\'이라 생각할 때,
그 일을 하며 적정한 보상과 대우가 따라주지 않으면
매우 힘들어 진다는 걸 모두 느낄 것이오...
물론 꿈을 바꾸는 것도 개인적인 결정이니 할말은 없지만,
길은 여러가지가 있지 않겠소?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나랏일을 하려하는 것도 좋지만,
한번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가장 인간적으로 대우받으며 (돈을 많이 받는다는 건 아니오)
그 \'길\'을 걷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나도 그 방법을 찾아 헤매는데 3년이란 세월을 지냈소...
물론 그 방법은 나에게만 맞는 것이지
모두에게 맞는 것도 아니오.
수많은 회사들을 다녀보니, \'궁합\'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오...
나도 늦깎이 직급이 아쉽긴 하지만
나에게 맞는 하나의 \'길\'을 걷고 있다는데 감사하고 있오...(참고로 교회는 다니진 않소)
인저 작년으로 돌아가서...
2005년 식목일이 휴일인 것을, 난 느끼지 못했소.
4월 4일 부로 실업급여 대상자에 포함되었으니까.
멍했던 4월이 거의 지나간 다음에야,
실업급여 생각이 나더이다.
고용안정센터는 아침부터 사람으로 꽉 차 있었소.
이렇게나 실업자가 많은 것인가...
연령도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이들부터 초로분들 까지,
모두가 웃음기없는 표정들이었소.
내가 가본 고용센터만 그런것인지 모르나,
처음가면 카드 작성하는 거 있지 않소?(알만한 분은 알 것이오)
그 접수라인이랑 2주 한번 취업노력 증명 접수라인이랑
구분조차 안되있더구려.
나랏일이란게...
그리고 처음 온 사람이 접수를 뭘 해야하는지 안내판 하나
붙여놓지 않았소.
관공서도 요새 서비스 정신이다 뭐다 하지만,
삽질하다 접수한 나로선 아직 멀었다 생각되오.
백여명 접수자에 담당자 두어명이고...나머진 빈자리...
이렇게 실업급여수령이 시작되었소.
그래도 채용공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2주일에 갯수 채우기엔 어렵지 않더이다.
그리고 그나마 경력이라고 아르바이트 자리도 좀 있어,
적은 돈이지만 실업급여와 더하니 당장 6개월은
버틸 수 있겠더이다.
그래도 취업은 해야하지 않겠소?
와이픈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라 했지만
나로선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소.
그러고 보니 졸업 후 6여년간 회사를 안다녀본 기간은 없었소.
모두들 취업전선에서 한번 쯤은 들어본 말,
\'첫 단추를 잘 꿰야 한다\'
명언이오...난 조급한 마음에 생각지도 않은 무대디자인과
준엄한 사회에선 인정받지 못하는 여러 회사 경력만
쌓였었소...
물론 그 때 얻은 것이 무엇보다 값지다고 생각하지만.
취업을 늦게 하더라도 제대로 된 회사를 가보자...
눈높이를 높여보자...
그렇게 생각하니 지원할 데가 없더이다.
기업 인테리어 담당자라는 것이 알고 보면 매우 드문 직업이라,
게다가 대기업을 눈높이로 하였으니...
그래도 이력서는 꾸준히 접수시켰고,
한달이 가고 여름이 지나가도록 연락은 오지않았소...
난 조바심을 넘어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소.
뒤돌아보지 않고 당당히 그만둘 때
\'난 어디든 들어갈 수 있어!\'란 자신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소.
하지만 접수시킨 이력서가 40개를 넘어갈 땐 별 생각이
다 들더이다.
\'너가 지금까지 취업을 잘 한건 너가 실력 있어서가 아니라,
그 정도 실력밖에 안되니 그렇고 그런 회사에서 뽑혔을 뿐이야\'
\'뭐하러 그만뒀냐. 남 좋게 하기위해서? 너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거야. 버텼어야지\'
\'와이프에 매달려서 살림이나 해\'
불량주부일기가 그렇게도 가슴에 와닿았던 적이 있었던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추석이 가까왔던 9월,
비스듬히 누워 드래곤 하트를 보고 있던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소.
\'안녕하세요, 김횽씨 되시죠?\'
\'예\'
\'삼성XX입니다. 입사를 축하드립니다. 출근은...\'
한번쯤 생각해 본 곳.
그러나 갈 수 없다고 생각한 곳.
난 그 곳에 간 것이오.
나의 직장취업기9 - 삼성. 그러나...
푸른 하늘,
살랑거리는 한강바람,
맑고 따사로운 햇빛.
지하철 역에서 내린 삼성맨이 느끼는 가을 아침.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지난 7년간의 세월이 영화필름처럼 뇌리 속에
스쳐 지나고 있었소.
매끈한 시설과,
모두들 똑같은 분위기의 표정,
매일 아침의 조회시간...
내가 본 삼성은 기업이 아니었소.
종교였소.
취업하려는 이들에게도,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도 말이오.
성공을 원하는 이들은 바로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며,
삼성은 그들에게 노동이란 십일조를 받고
일류라는 자부심과 최고의 부를 얻는다는 믿음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리고 한치의 벗어남에 따라 정말 합리적인 지옥불 같은 연봉격차가 나며,
그것이 모두들 알고 있는 내부경쟁이란 것을 느꼈을 때,
디자인의, 디자인에 의해, 디자인을 위한 삶보다
워드와 액셀 통계에 지쳐갈 때,
조금만 참아보자. 나의 판단을 정말 내가 믿을 수 있는가.
하지만 과연 이 길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인가.
5년까지만, 3년까지만, 올해까지만, 이번 달 까지만.
하루하루 수정하며 이미 나에게 삼성은 곧,
버티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소.
하지만 이건 나의 느낌이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이들은 정말 실력자고 엘리트들이며,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오.
삼성이 그저 돈이 많아 월급을 많이 준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오.
물론 순이익이 몇조가 넘는다는 기업이지만
그렇게 이익을 내기위해 수만명의 직원들이
얼마나 노력을 하겠소?
삼성은 일하는 것에 비해 연봉이 정말 적다고 생각하오.
난 그만두었소.
이 종교를 믿으면 천당가고 극락왕생을 한다고 한들,
내가 안 믿으면 할 수 없는 것이잖소?
직장 다니며 연휴를 그리워하지만,
막상 연휴가 오면 그 큰 기대는 사라져 버리지 않소?
난 운이 좋아 그 연휴를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이미 내 핏속에는
방송연예계와 패션에 묻혀온 자유스러움이 나도 모르는 사이 본능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하오.
오래 다니면 바보가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높은 연봉과 자부심에 대한 아쉬움.
참을성 없는 나에 대한 실망감.
나를 만들 수 있는 곳에 가야 한다는 의무감.
사직서를 낸 아침, 버스를 기다리며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소.
나의 직장취업기10 - 난 나의 길을 간다
삼성을 그만둔 후, 난 이전 실직 때 보다 더 큰 절망에
사로잡혔소.
높은 곳에서 떨어질 수록 더 아픈 느낌,
조바심과 참을성없는 미덥지않은 내 마음,
두달 남짓한 올해가 가면 끝이라는 두려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아무곳에도 나가지 않고,
차거운 삼분카레 하나로 하루를 버티며
취업사이트에 파묻히며
나 자신에게 무관심해 졌소...
그러기를 일주일,
패션회사, 화장품, 건설시행사, 세 곳에서 거의 동시에
연락이 왔소...
이젠 취업할 직장이
내가 그만두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잘할 수 있어 끝이 보이는 곳보다
나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소.
하지만 난 때가 되면 또 어딘가를 갈 것이오.
직장은 안식처가 아니지 않소.
IMF 1년차에서 막장인생, 학연의 절망감, 전국을 누빈 현장,
대기업 맛보기...
이제서야 내가 어디를 가야할 지, 언제 가야할 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소.
글쓰기를 시작하며 파란만장한 내 기억에 바보스런 자만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글을 한편 한편 올리며 조금씩 겸손함을 배우게 된 것 같소.
취업겔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속히 좋은 곳에 가시기를 빌며
이만 부족한 글을 마칠까 하오.
끝으로 성인의 글을 빌어
취업전선의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억지 일 꾸미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억지 일을 꾸미면
세상을 다스리기엔 족하지 못합니다.-
모두들 화이팅!~~^^
나의 직장취업기 11 - 그래도 시간은 간다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올해 초 나의 직장취업기를 연재했던 햏자요.
쓴 글을 한번 검색해 보았으나 오래되어 검색이 안되더구려.
여기 글들의 수명이 일년이 채 안되는 것 같소.
이리 문득 다시 쓰기를 해보는 이유는
글을 올릴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돌아보기 위함이오.
어떤 것에 도달하는 것보다 지켜내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지않소?
재취업한 나의 몇번째 직장.
비록 건설현장 임시사무실이지만 나름대로 종무식이라고 맥주도 먹고...
정말 종무식에서 난 한해를 뒤돌아보게 되더이다.
일년이 순식간에 지나갔소.
과거에도 정말 이렇게 어렵게 일해온 직장이 있었는지...
올 한해를 보내며 내가 느낀 것은,
능력이 있는 자가 회사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능력있는 자를 만들며,
능력있는 자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보다
경험있는자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크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경험이라는 것이었소.
그래서 머리빠지도록 스트레스 받아도
버텨야하는 곳임을,
그렇게 버텨서 나에게 남부럽지않는 커리어가 쌓인다면
해볼만한 거래라는걸 알았소.
커리어는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오.
그 진행과정이 말도안되는 헛짓거리로 점철되었어도,
정말 창피하도록 황당한 결정들이 반복되었어도,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드러난 멋진 결과만을 보오.
물론 멋진 진행과 멋진 결과를 동시에 이룰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으나,
이전의 삼성도 그렇진 않은 듯 하더이다.
버티는 것도 기술이오.
그리고 한해의 막바지에서 그 버티고 싸운 것이 너무 보람있었다는 것을 느꼈소.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만족하고 내 한몸 건사하며 유지하는 것은 더 힘든 것 같소...
모두들 힘내시고 새해 좋은 곳 가시길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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