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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글)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3/3)
[시리즈]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 정성글)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1/3) · 정성글)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2/3) · 정성글)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3/3) 1924년, 레닌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만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끌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대신, 유언장을 통해 후계자 후보들에 대한 의견 정도만을 남겼다. 레닌의 유언장에서는 스탈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스탈린 동지는 서기장이 되면서 무한한 인사권을 갖게 되었지만, 그 권한을 신중히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중략...) 스탈린은 너무 거칠다. 이러한 결점은 서기장 직책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동지들이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임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중략...) (스탈린을 대체할) 이 사람은 동지들에게 더 관대하고, 보다 인내심이 강하고, 충성스럽고, 예의 바르고, 덜 변덕스러우면 된다. 이 점들이 아마 보잘것 없는 작은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중략...)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그러나 레닌은 자신의 명성을 활용하여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사라도 확인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년에 경고만을 남겼을 뿐이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레닌이 범한 실패 중 하나가 되었다.1922년, 스탈린은 서기장이 되었다. 서기장이 되면서 그가 얻은 인사권은 매우 강력한 권리였다. 레닌은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에, 후계자는 당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당은 누구인가? 당은 인민이었다. 그 인민은 누가 선택하는가? 인사권을 가진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공산당 지역위원회 서기들을 임명했고, 이 서기들은 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여 거수기 노릇을 할 지역 대표들을 선출할 사람들을 임명했다. 그들을 뽑아준 사람들을 뽑아준 사람은 스탈린이었다.1927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스탈린은 어떤 인물일까. 피해망상을 가진 사이코패스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집권 후 레닌의 유언장에 언급된 인물들 중 제르진스키, 오르조니키제, 트로츠키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처형했다. 제르진스키는 스탈린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인 1926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오르조니키제는 1937년 비밀경찰의 손에 죽기 전 한 것 같은데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트로츠키는 추방되었고, 1940년 멕시코시티에서 암살당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경쟁자였던 모든 이들과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고, 그 자리는 철저히 스탈린에게 의존하고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로 채워졌다. 1927년 당시 소련의 상황을 보자. 이 해 소련은 기대수명, 인구, 산업생산, 생활 수준에서 1914년의 수준을 회복했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됐고, 자원만 축내던 귀족정도 사라졌다. 이에 인민들은 지지를 보냈다.그러나 여전히 위협이 존재했다. 소련 고위층은 자본주의 세력이 자신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체제를 전복시키려 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이미 적백내전과 폴란드와의 전쟁을 겪었고, 이후 나치 독일이 침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우려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소련 지도부는 생존을 위해 빠른 산업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스탈린은 이를 위해 5개년 계획을 시행한다. 그는 성장하는 산업 도시로 노동자들을 이주시키고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민들을 집단 농장으로 집산화시켜 농산물을 아주 낮은 가격에 공급하도록 강제했다. 공산품 가격은 계속해서 상승한 반면, 농산물 가격은 계속해서 하락했다. 많은 농민이 도시로 떠나 노동자가 되었으며, 남은 농민들은 공산품을 구매할 수도 없었고, 농산물을 팔아 충분한 수익을 얻지도 못했다. 즉, 스탈린은 산업화 추진을 위해 농민들을 착취하는 방식을 채택했다.농민들은 불리한 거래 조건에 반발하며 집단 농장을 거부하고 자급자족 농업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농산물 유통량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도시는 식량 부족에 시달리면 대혼란에 빠졌다. 스탈린은 이 위기의 원흉을 쿨라크(kulak)라 불리는 부농이라고 보았다. 쿨라크들이 곡물을 비싸게 팔기 위해 감추고 내놓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탈쿨라크화 정책을 시행했다. 쿨라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집단 농장에 추방했다. 그렇게 소련 정부는 전체 농민의 약 94%를 국가 소유의 집단 농장에 소속시켰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농민들이 처형되었고, 수용소로 끌려갔고, 굶어 죽었다. 아마도 1,500만명 정도가 죽었다. 농업 생산량은 3분의 1이 줄었고 가축 수도 절반으로 줄었다. 도시 산업생산 능력의 일부를 농민이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돌려, 농민들에게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하며 더 많은 식량을 거래할 수도 있었다. 수많은 농민들을 희생시키는 대신 살려 두고, 그들의 곡물을 소비재와 교환하도록 만드는 방식이 더욱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련 정부가 선택한 방식은, 앞서 언급한 비효율적인 사실상의 농노제였다.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는 중금속 제조업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뜻에 따라 대규모의 중공업 공장이 우랄 산맥의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조성되었다. 이 지역은 인구가 매우 적었다.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할 생각도 없는데, 스탈린은 어떻게 이 춥고 낙후된 지역으로 노동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그는 강제적인 징발을 활용했다. 국내 여권 제도는 노동자들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고, 일자리 여부에 따라 주거지와 배급 통장을 배정하는 방식은 이들이 일자리를 갖도록 강제했다. 징발을 거부하거나 고용주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수용소로 추방되었고, 처형되기도 하였다. 마그니토고르스크뿐만 아니라 소련의 많은 계획 공업 도시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소련의 성공적인 산업 도시 구축의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자유 박탈과 희생이 있었다.5개년 계획은 분명 효과를 보았다.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의 산업생산은 1933년에 181%, 1938년엔 558% 증가했다. 1928년부터 1958년까지 실질 국민생산은 평균적으로 매년 4.5%씩 성장했다. 이는 인상적인 수치이다.그러나 그 대가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었다. 집단 농장에 반발한 농민들은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공장 노동자들도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스탈린에게 반대 의견을 내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그저 스탈린에게 거슬리게 느껴진 지식인들도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관료들과 공산주의자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1930년대 대숙청에서 죽거나 유배된 당원과 정부 공직자는 500만 명이 넘었다.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끊임없이 채워졌고, 그들은 그곳에서 죽나갔다. 스탈린 시기 소비에트의 정치, 경제 시스템은 실로 수많은 인민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돌아갔다.마르크스가 이 꼴을 원했을까? 만약 마르크스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아마 음울함과 경멸의 표정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르크스는 예언자였다. 자신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행보를 바라보며 음울함과 경멸을 느끼는 것은 예언자들이 빈번히 맞는 숙명이다.-「20세기 경제사: 우리는 유토피아로 가고 있는가」(브래드퍼드 들롱)를 읽고 작성함.
작성자 : 땅콩쓰고정닉
싱글벙글 의외로 반일오졌던 새끼들...jpg
그건 바로 대만 대만은 대표적인 친일국가지만, 그 이전엔 존나 한국보다도 더한 반일국가였음. 그도 그럴만한게 중화민국이 공싼당에 패배한 큰 이유중 하나가 난징사태였고, 국가가 완정되기도 이전에 쪽본이 국토 구석구석을 개십창내놓은것도 있기때문에 좋아할래야 좋아할수가 없음.. 근데시발 이새끼들은 어떻게 쪽본 호감도 세계최고를 찍는 나라(공식적으론 나라 아니긴 하지만)가 되었을까? 때는 중화민국 군사정부 시절... 빤쓰런해온 장제스는 섬짱 주민들을 쪽본에 협력한 토인새끼들로 보고 지들이 데려온 국민당인사들만 존나 편애했음. 게다가 담배팔던 할머니 개머리판으로 찍어서 중태만든거때문에 폭동나니까 토인새끼들 괘씸하다면서 바로 계엄령때리고 본토에서 국민당군 영끌해서 시위대들 다 쏴죽임. 씨바 이때 국공내전 안 끝났고 국민당 좆돼가고 있었는데 폭동진압하겠다고 본토병력을 끌어서 쓴거였음 ㅋㅋㅋㅋㅋ 심지어 계엄령은 38년 후에야 끝남. 장제스 이새끼 몇 석열을 한거노 도대체... 당연히 처음엔 왜놈들 물러가고 동포들 온다고 싱글벙글하던 대만인들도 존나 좆같아하기 시작함 이때부터 "그래도 씨바 왜놈들은 병원도 지어주고 학교도 지어줬는데 이새끼들은 뭐하노? 왜놈들이 더 나은거 아니노?" 같은 여론이 생기기 시작함. 결국 80년대쯤 한국하고 비슷하게 민주화를 함. 다만 민주화 과정이 우리랑 좀 다른데 우리랑 달리 대만은 장제스 아들 장징궈가 스스로 사과하고 물러나서 민주화가 됨. 우리로 치면 박정희 권력을 직통으로 물려받은 박근혜가 스스로 물러나면서 민주화가 된 격 ㅇㅇ 여튼 민주화이후 우리랑 차이점은 우린 민주화이후 민족주의가 존나 강해졌지만 대만의 경우 탈 중화민족주의가 강해짐. 민주화이후 본토에서 내려온 적폐 외성인들하곤 "다른 민족" 이라는 정체성이 생겼고, 군부시절에 반공교육 존나세게받은 팔륙이들이 반발심으로 주체사상 빨았듯이 군부시절 반일민족교육 존나세게받은 대만인들은 반발심으로 일본을 존나빨게된거임 물론 대만인 정체성보다 중국인 정체성을 많이 가진 복건성출신 외성인들은 아직도 일본 존나싫어하는 새끼들 많음. 대충 대만 내 세력 구도를 정리하자면 외성인 - 국공 내전에서 패하고 대만으로 이주한 세력. 반일 성향. 중국인 정체성, 국민당 지지 본성인 - 청나라 때 대륙에서 이주한 세력. 친일 성향. 대만인 정체성, 민진당(민주진보당, 만진당 아님) 지지 원주민 - 고산족이라고도 함. 동아시아인보단 일본 죠몬이나 태평양 폴리네시안쪽하고 유전자 가까움. 일본한테 토벌당한적 있어서 반일성향 좀 있긴한데 한줌단이라 딱히 영향없음. 관광으로 돈벌어야해서 일본인한테도 친절 화교 - 국적"만" 대만. 대만하곤 딱히 상관없고 국적만 "중화민국"인 새끼들임. 동남아화교는 광동성, 한국화교는 산동성 출신이 많음. 성향은 애초에 대만하고 연이 없으니 중국인정체성 강함. 그래서 국민당 집권하면 해외표 영끌하려고 화교 투표권 이악물고 받으려하고 민진당 집권하면 화교들 외국인이라면서 버리려고함 그리고 앰생농도 좀 높아서 젊은층은 일뽕비율 좆됨
작성자 : 닭장매니아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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