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다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정말 동시대의, 같은 또래 중에서 누구보다 다양하고 비참한 삶을 경험하면서도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알량한 자존심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흐름에 의하여 글을 작성함에 따라 다소 무질서하고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너른 이해부탁드립니다.
저는 능성 구씨, @@@@파 28대손 90년대생 남성입니다. 살면서 가슴 속에 쌓아온 고민을 누군가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정말 상황을 타개하고 보란듯이 성공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녹록치 않기에, 의미없는 행위에 그칠 것이 분명하지만 이곳에 이렇게 글을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간절한 마음같아선, 이 하찮은 푸념의 글이 'LG 구광모 회장님 / LX 구본준 회장님 / 쿠쿠 구자신 회장님'과 같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분께 도달하면 좋겠습니다..
[성장배경]
삼남이신 할아버지는 어릴 적 '법조인/판검사'라는 막연한 꿈을 품도록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지하에 위치한 서점에 가서 두꺼운 대한민국 헌법 책을 사 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 형제 중 먼저 제가 초등학생일 때 돌아가셨습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제게 할아버지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으로 역할하셨습니다.
할아버지 생전 그리고 큰/작은 할아버지 생전에는 선산과 묘소 관리를 위하여, 항상 1년에 2번 이상은 6촌까지 모임을 가지곤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평범한 공무원으로 근무하셨으나, 큰 할아버지는 소장사를 하면서 상당한 부를 거닐게 되셨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집안보다는 그래도 사이가 가까운 편인 것 같습니다. 큰 할아버지 아래, 당숙부와 형제분들은 다들 순자산이 수십에서 수백억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현재 진보 측 유력 정치인 분과도 돈독한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용돈을 받거나 성인이 되어서도 숙부가 식사로 코스 요리를 사주신 적은 있으나 따로 연락을 드리거나 도움을 청한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 형제들도 최소한 순자산이 10억 이상 있지만 제가 아는 한, 아버지에겐 30년을 살아온 25평 지방 집 한 채와 지방에 보유한 작은 논이 전부입니다. 채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3억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환금성 없는 선산과 묘소는 제외하였습니다)
사촌을 포함하여 가장 연장자이자 장남인 아버지는 항상 할머니와 형제를 생각하였으나, 공상에 그칠 뿐만 아니라 친인척에게 도움을 줄 능력은 애시당초 부재하였습니다.
한편, 가정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었으며, 모든 경제권을 지니고 현황을 가족에게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에서는 체면을 차리고 그럴 듯하게 행동하셨지만, 정작 가정은 해체 위기에 놓여있던 것입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어릴 적 TV에서 방영하던 SOS 라는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어머니와 연년생 동생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는 공기업을 다니셨으나 잘못된 선택을 통해 전통적인 희생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무기력하게 살아오셨습니다.
동생은 적당한 고등학교에서 문과 1등을 하였으나, 악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기도 하고 저와 비슷한 경제적인 이유로도' 중경외시 중 한 곳에 진학했고 대학생이 되어서 적성과 맞지 않는 전공으로 인하여 방황하다 겨우 졸업 후 전공과 완전히 무관한 일을 하며 살고 있으며 결혼 적령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결혼을 못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2025년 현재, 친척을 비롯한 주변 가족들 중에서 금전과 행복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저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대에서 시작된 업보이자 일련의 과정에 대한 응당한 책임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불행한 삶 속에서 엇나갈 수도 있었지만, 꾸준히 공부하였고 사교육 도움없이, 괜찮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우외환 환경 속에서, 고등학교 1,2학년 방황하였고 한달 가까이 가출도 하였습니다. 저도 참 비참하게 그런 상황에서도, 끝내 스스로가 불쌍하고 더 빨리 포기하지 않은 것이 억울했는지 꾸역꾸역 쉼터에 머무르며 통학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학년 겨울방학이 되어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렇게 살려고 이 학교를 선택한 것이 아닌데..'라고 말입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수학에 큰 적성과 흥미도 없었던 저는 중학생 시절, 카이스트를 졸업한 열정이 넘치는 과학선생님을 통해서 제가 마치 아인슈타인이라도 된 것처럼 지구,화학,생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고등학생이 되어선 약대를 진학해서 제약 연구원이 되고 싶었기에 이과를 선택하였음에도 항상 모의고사에서 수학 3-5등급 / 국어 영어 과탐2과목 1등급(과학은 대부분 만점, 나머진 가끔 2등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400점 만점에 고3 때 모의고사로, 수학이 60-70점을 받으면서 총점 340-350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시에 대입하면, 중앙대 이과는 갈 수 있는 성적일 뿐만 아니라 문과로 전향한다면 380점은 받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은사이신 고3 담임선생님께선, @@야. 수능에서 수학 3등급만 맞아도 지금 성적이 유지되면 너가 원하는대로 중앙대를 갈 수 있고, 가서 PEET를 통해서 약대를 갈 수 있겠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고3 내내 수학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과학, 영단어를 중점적으로 공부했지만) 결과적으로 수능에선 고3 중 제일 높은 수학 성적을 받았지만, 제 노력이 많이 부족하였기에 다른 과목에서 실망스러운 점수를 받으며 중앙대는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재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천만원이 넘게 필요한 재수를, 아버지는 고려하지도 제 의견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제 삶을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저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동생이 치르게 된, 다음 수능은 중상위권에게 매우 유리하게 출제된 물수능이었습니다. 불수능의 결과로 아쉬운 성적을 받아든 친구들 대부분은 일약 성과를 거두며 다 웃게 되었는데 친구로서 축하는 했지만 스스로 너무나도 초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성적에 맞춰서 대학을 진학하였고, 졸업 후 산업요원으로 근무하면서 2023년 6월이 되어서야 병역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학교는 아니지만, 1,2학년은 정말 서울대 친구들을 넘겠다는 오만과 오기패기로 공부와 경쟁에 혈안이 되어 살았습니다. 추가적으로 연구실/취업창업동아리/산악회 등 다양한 활동도 조금씩 하면서 다행스럽게도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졸업생 1등으로 선서를 하며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문과에 유리한 머리임을 뒤늦게 자각하고, 사실 고려대와 한양대 행정학과 편입도 고려했지만 아버지는 욕설과 함께 매몰차게 비난하며 지원을 해주시지 않았고 저 또한 의지가 부족했기에 단념 후 뒤늦게 휴학을 한 차례 한 뒤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낭만과 행복으로 시작한 사회생활]
남고와 공대를 졸업한 저는, 패션을 포함한 외모관리에 무지하였고 22살에야 첫 연애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에게 다가가는 성격도 아니고 삶에서 가까이 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모든 사람을 소개팅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 만났습니다.
오랜기간 독립적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서일까요?
이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 결과 짧게 1~6개월의 연애를 24살까지 5번 하였습니다.
외모에 대한 기준은 객관적으로 낮았지만 대신 제 부족한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집안 분위기, 학벌, 성격'을 갖춘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산업근무요원으로 근무할 회사에 취직이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앱에서 제게 먼저 대화를 신청한 1살 연상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대화가 잘 통했고 마음이 맞았습니다. 만남을 미루고 미루다 연락을 한 지 한 달이나 지나고 강남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본가가 있지만, 인근에 독립하여 자취를 하고 있던 그녀는, 유명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똑똑한 사람이었고 직장인 2년차였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엄마같은 사람으로 다가온 그녀와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하기도 전에, 지금은 7살이 된 첫째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놓치기 싫었고, 임신중지를 결정하면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였습니다.
'남자로서 책임을 지고, 그녀와 아이들과 행복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였고 혼인신고를 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첫째는 태어났고 2022년엔 둘째도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불우한 환경이 유발한 돈에 대한 집착, 계속되는 역경과 시련]
저는 초등학생부터 학교에서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은 항상 도서관에서 보내며, 책을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주로 비문학과 경제(주식 등)에 관련된 서적이었습니다. 수능을 마치고 미니스톱 편의점에서 야간으로 한달 근무하고 받은 55만원으로 처음 한 행동은 제 명의 한국투자증권 계좌를 개설하여 주식투자를 한 것입니다. 사실 모든 분들이 인정하시겠지만, 주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와 기업가치 그리고 타이밍'입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바로 '목돈'임에도 저는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한국장학재단에서 생활비 대출을 받은 금액과 소정의 용돈을 전부 주식에 투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유자금이 아니었으며 금액이 항상 작다고 여겼던 저는 '미수와 신용거래'라는 건드려서는 안될 것을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항상 수익을 봤으면 상관 없겠지만, 순간적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2천만원 ~ 9천만원 가까이 자산을 증식한 적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미수거래'를 통해서 대학시절 깡통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전, 직장인 1-2년 차에 적지 않은 월급을 받으면서 미수거래는 하지 않지만 여전히 목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신용거래'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결과적으로 두번째로 깡통을 차며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2022-2023년 점차 투입되는 금액도 거치고, 마침내 대출을 받아서 주식투자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출받은 돈을 이용하여, 신용거래라는 레버리지를 또다시 일으키면서 투잘를 하였고 22년 말과 23년 초에 순간적으로 드디어 순채무가 아닌 순자산이 +2억이 된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 때,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왔으면 좋았겠지만 대출의 상당수를 갚고 필요한 곳에 돈을 쓰면서도 적지 않은 금액으로 투자를 이어나갔습니다.
사실 주식이라는 것이, 기업 선정만 잘하면 역경의 시기만 견디면 반드시 수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출이 개입되는 순간, 정상적인 투자원칙은 지켜질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끝내 23.04 ~ 07월 보유 주식의 평가손실이 증가하면서 대출을 다시 받고, 그 대출을 이용해 또 다시 신용거래를 하면서 순채무가 6천만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식반대매매를 막으며 버티면, 분명히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때 저는 너무나도 이기적이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집안은 2023년 정도가 되면 결혼식을 하자고 애시당초 약속했으나, 주식 투자 상황이 좋을 때 제가 언급하였음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또한 전처도 제 지성과 욕심에 매력을 느낀 부분도 있고 혼인을 하면서 제 2번째 꿈을 위한 2년을 이유를 막론하고 지지해주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사하거나 휴직을 하는 것에 대해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식투자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내집안은 순자산이 그래도 10억은 되고 주식은 아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에 버티면서 기다리면 충분히 어느정도는 회복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른 살이 다가오는 저는 물론 두 명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 두 명 있기는 했으나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육아 등에 도움을 줄 제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들이 있기에 최대한 빨리 합격하고 공부를 마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제 꿈은, 로스쿨에 입학해 법조인이 된 뒤(판검사가 되면 좋겠지만) 추후 경력직으로 공무원 특채에 합격해 근무하면서, 상황이 허락한다면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이후 교수가 되는 것이 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호의적이지 않은 아내에게 (그동안의 일련의 폭행을 당한 사실도 있고, 성격차로 인하여 부부싸움도 잦았기에)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데, 내가 처해있는 상황은 다 알고 있지만 꿈을 포기하고 계속 회사를 다닐 수는 없어. 지금 최대 2년 정도는 내 꿈을 위해서 투자를 해야만 하고, 2년 내에 꿈을 이루지 못하면 단념하고 지금의 일을 계속할게. 그러니까 힘들더라도 지지하고 도와줘. 현재 주식투자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바로 LEET시험도 있고 당신 집안은 여유가 어느정도는 있으니까 5천만원만 학업을 위해서 구해오면 좋겠어. 나는 더이상 내 꿈을 지지하지 않는 당신이 5천만원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당신과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별거를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호의적이지 않아서 아내는 끝내 5천만원을 구해오지 않았고, 못했습니다. 별거를 한 지, 한달이 경과했을 때 마지막으로 전처와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알고보니, 대한민국에서 나름 거물인 이사장님을 찾아가 '제 이야기와 함께' 상황을 전하며 고견을 구했다고 합니다.
저는 전처로부터, 이 말을 듣는 순간,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괜한 행동을 하면서,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남편 명예를 실추시킨' 전처가 원망스러우면서 자존심이 너무나도 상했습니다. 아내가 말하길, "이사장님이 당신더러 여의도로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어, 한번 가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제 상황이 쪽팔리고, 자존심이 상해서 당숙부를 포함한 친척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못했고 않았습니다.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로스쿨 준비를 한다는 사실도, 회사 동료를 포함한 학교 선후배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고작 5천만원을 사위 또는 남편을 위해서 마련해서 주지 않는(못하는) 처가에도 너무나 실망했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내는 사실 그렇지 않았지만, 전처에게 이혼하자고 선언한 뒤 별거를 이어나갔습니다.
이후 2주가 채 지나기 전에, 제가 집을 비웠을 때 아내와 가족은 일련의 범죄행위를 통해 환금성이 있는 동산과 계좌에 있는 부부공동재산을 반출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일련의 범죄 사실을 저질렀습니다. 이후 쌍방 이혼소송과 형사고소고발을 진행하면서 저는 끝내 무혐의가 나왔으나 아내는 가족은 대부분 피해갔지만 폭행으로 인한 벌금형을 확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기적이고 한심하고 말도 안되는 것을 알지만, 지난 1년 6개월 동안 6개월을 제외하곤 무직으로 생활하며 LEET와 로스쿨 배경지식 공부가 아닌 '송사'에 대부분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두 자식'을 제가 양육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 두 자식에게 애착이 있으며 1주-1달 간격으로 꾸준히 면접교섭을 하면서 최소한의 양육비를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말 슬프고도 비참한 것은, 지금 이 순간도 제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서로 남같이 지내며 경제적인 지원을 전혀 할 용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전처에게 목놓아 부르짖던 5천만원이 아닌, 3천만원 아니 2천만원을 오롯이 현금으로 인출하여 학업을 위해 지출하겠다고 했음에도 대화가 안 통하는 분들입니다.
올해도 무의미하게 지나가면, 아무리 로스쿨을 30대 후반과 40대가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직인 상황으로는 더이상 생계를 이어나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제가 더는 살 의욕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정신적인 신체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겪었습니다. 우울증과 무기력함에 압도되어 생활하고 술에 의존 도피하며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정말 제 인생에서 흘려보내서는 안되는 시기이기에, 1월부터 금주를 하면서 매일 운동도 하고 LEET공부(언어이해/추리논증)를 하고 있습니다.
로스쿨을 입학해서도 문제지만, 그 때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숙부 또는 친인척을 찾아가서라도 학비에 대한 지원을 간청할 생각입니다.
20대에 또래보다 적지 않은 연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악순환을 반복하며 작금의 상황에 이른 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화가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목숨과 꿈을 아직은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빨리 포기할 수 있었음에도, 어릴 적부터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고 지금에 이르렀기에 쉽게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11/12월에 시작된 입시 학원을 하루라도 빨리 가야하는데, 7월에 있는 시험을 중간이라도 봐서 지방거점국립대라도 가려면 3월에라도 학원을 다녀야하는데 현실적인 요건이 되질 않으니 정말 미칠 것만 같습니다. 저는 반드시 가고 싶은 로스쿨이 한 곳 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제 꿈을 꼭 이루고 싶고 그러고 말 것입니다.
제 스스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성을 통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LEET 공부와 로스쿨 입학' 그것 뿐입니다.
-------------------------------------------------------------------------------------------------------------------------------------------------------------
저는 어릴 적부터 뼛 속까지 LG를 새기고 자신을 LG로 표상화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변호사가 되었을 때, LG계열 사내변호사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꿈이 좌절되면, 기존에 하던 업무와 무관하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서, LX 인터내셔널 자원개발사업부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LG트윈스 열성팬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잠실운동장에서 하는 야구응원이기도 합니다.
막무가내로 LG트윈타워 지하주차장 로비 구내식당에서 구광모 회장님을 알현하기 위해서 무작정 시간을 허비하며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FRONT에 방문하거나 통행하는 인원(임원)을 붙잡고 방도를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네요. 제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저는 무슨 선택을 해야할까요?
삶이 이렇게 쉽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많은 분들의 따끔한 조언과 충고에 대해서 미리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LG LX 아워홈 LIG LS LF 쿠쿠 등.. 백색가전과 대한민국의 미래 한 축에 LG가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