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계획
막상 마음이 정해지니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던 게 확실한 그 아이의 눈빛이 눈에 선하여
그 어떤 고민도 들지 않았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의외로 담담했다.
아저씨는
-언젠가 떠날 사람임을 알고 있었으니 어쩌겠나. 우리 같은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자네 앞길을 막겠나. 내 아무것도 모르지만 우리에게 오기 전 귀하게 자란 듯 한데 이렇게 거칠게 살게 하여 미안하오.
하였다.
그러면서 아저씨는 평양의 아저씨에게 부탁 받고 맡아 놓은 것이라고 내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어머니가 내 몫의 유산이라며 남겨준 것이었다.
-제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에요. 아저씨께서 처분해 주세요.
하자 아저씨는 손사래를 치며
-그런 말 마시게.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거 어떻게 처분하는 줄도 모르네.
두 번을 말하면 화를 내실 것 같아 나는 일어나
두 분께 큰 절을 올렸다.
아저씨는 얼른 자세를 고쳐 맞절을 하고는 말하였다.
-인연이 여기까지니, 떠나고 나면 우리를 찾지 말게나. 괜찮으니.
그러나 아주머니는 많이 우셨다.
오히려 스승님은 나를 잡았다. 아직 배울 것이 남았으니 겨울쯤에 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래도 가겠습니다.
했더니,
-내가 마신 술만큼 네가 마저 배워야 내가 네게 빚이 없을 것 아니냐.
하였다.
어쨌거나 그는
-이놈아, 니놈이 멋대로 ‘나 받아 주쇼’ 한다고 너를 받아 주는데가 기방인 줄 아느냐? 그럼 팔도강산 모지리들이 다 기생하겄다. 에잇, 고집불통 같으니.
하더니 다음 날 나를 데리고 기방으로 가 그곳의 어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 발치에서 무슨 소리인지는 들리지 않지만 스승님은 분명 내 칭찬을 하고 계심을
나는 알고 있다. 저렇게 말을 거칠게 하는데도 어찌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그리고 내 어머니. 내 어머니 같은 이들은 또 품위있게 말하여도 어찌 그리 차갑게 느껴지는 것인지.
나는 그간 사람 속에 든 것이 과연 어떻게든 밖으로 드러나게 됨을 배웠다.
-숨길 수 없어 이놈아. 니 속에 한 이 있으면 다 나오고, 미움이 있으면 다 나온다.
스승님은 내게 늘 그렇게 말하면서 속에 한이 너무 많아도 탁한 소리가 나오고 너무 맹탕이라도 멋없는 소리가 나온다 하셨다.
기방 어른으로 보이는 나이가 제법 든 여인과 그 곁에 비교적 젊은 여인이 나를 눈여겨 보는 것 같아 나는 괜히 몸이 흔들거린다.
그때였다.
-얘!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그 아이. 혜랑이었다.
그 아이는 반가움에 서운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왜 저번에는 그냥 갔어…
하였다.
나는 너를 기다리려 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에서는
-스승님이 가자고 하셔서.
라는 말이 나온다.
-너 내 이름 기억해?
-어…
그 아이는 기어코 내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들어야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아무 말이 없다.
-혜랑. 서혜랑이잖아. 네 이름.
괜히 기분인지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아이는 좋아라하며
-그런데 나도 네 이름 알아.
하는 것이다.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있나? 생각하며 그 아이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옥경. 그런데 성은 몰라. 네 스승님이 너 부르는 거 들었어.
하는 것이다.
그때 저기서 스승님이
-옥경아, 문옥경. 이리 와 보거라.
하고 손짓을 하는 것이다.
내가 막 뛰어가려는데 그 아이가 내 손목을 잡았다.
-문옥경. 언제, 또 와?
나는 황급히, 그러나 그 아이의 눈을 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나, 여기 들어오려고.
-뭐?
그 아이의 반달같은 큰 눈이 깜짝 놀라 더욱 커지는 것이 마음에 든다.
-다음에 또 보자, 혜랑아.
겨울에나 떠나라고 붙들던 스승님의 말에
-기방에 오셔서 가르쳐 주시면 되잖아요.
라고 볼멘 소리를 해서였을까.
훗날 그는 가끔 기방에 올 때면 내게 소리를 시키고는 언제나처럼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곤 했다.
기생이란 것들이 소리 하나를 똑바로 못 가르쳐 애를 버려 놨다며 몇 가지를 슬쩍 짚어 주고 가는 것이다.
소복은 예기들의 교육 과정에 주제 넘게 간섭한다며 스승님을 질색 하였고
특히 그의 거친 말버릇을 싫어하였다. 소복은 은근히 나를 스승님과 떼어놓고자 하였지만
나는 그의 말마디 사이의 깊은 정을 느꼈기에 스승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스승님과과 연을 끊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그 해 여름이 되기 전에 나는 혜랑이보다 1년 늦게 예기 과정에 들어가 다양한 과목을 배웠다.
기본적인 소리와 악기, 춤과 노래는 물론이고 시,서,화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다.
어린시절 아버지께 붙들려 오빠들과 함께 한자를 제법 깨쳤던 나는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
물론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곳에서 배우는 것들은
소학교 때 배웠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뭔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배운다기보다는 끌어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배운다기보다는 다듬는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예인과 예인을 거쳐 전해 내려오는 아주 오래되고 고고한 것이 그 배움 안에 있었다.
몸과 머리와 마음을 다 써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마음이 딴 데 가있으면 춤도 흐트러지고, 몸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3년의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면 이미 기생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3년의 과정을 마치면 옛날 말로는 일패 기생이라 하여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나는 혜랑이와 함께 3년의 과정을 다 마쳤고, 어느새 기방에서 중요한 공연을 도맡아 하는 기생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주로 큰 잔치나 행사에 불려가 시작이나 마침 공연에서 잔치의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은 우리의 소리나 춤에 흥겨워하였고, 함께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이들도 많았다.
내가 주로 소리를 하거나 악기를 다루면 혜랑은 춤을 추었는데 우리 둘이 호흡이 좋을 때면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도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만큼 사람들은 숨죽인 채 우리의 공연을 보곤 했다.
그러나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예술에 능한 기생이 되었으나, 막상 기생이 되는 과정 보다 기생이 된 후의 일이 더 어려웠다.
현장에서 춤과 노래, 소리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우리가 가진 예인으로서의 자존심은 그저 우리의 것일 뿐, 세상은 점점 변하여 사람들은 우리가 땀흘려 노력한 것 만큼의 가치를 평가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보여주는 예술을 즐기고 알아보는 이들 보다는 그저 술자리에 흥을 돋우는 정도 이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특히 혜랑이, 혜랑이가 많이 힘들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을 나가면 얼굴이 인형처럼 예쁘고 춤에 능한 혜랑이 우리 가운데 단연코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기까지면 좋은데, 점점 수준이 떨어지는 손님들이 늘어간다는 것이 우리의 어려움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정해진 공연을 마치면 일을 끝내고 돌아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지만,
그 자리에서 웃돈을 부르며 술자리에 동석하기를 원한다든지, 더한 요구를 하는 일들이 갈수록 빈번해졌다. 그런 자리에서 진을 다 빼고 나면
가끔 혜랑이는
-차라리 식간에서 일할 때가 좋았어. 그 때가 훨씬 마음이 편했어.
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
-많이 힘들어?
내가 물으면 혜랑인
-모르겠어. 그냥 좀 무서워.
라고 한다. 나도 모르게 혜랑이랑 같이 일을 하러 가면 손님들의 얼굴을 보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작자일지 생각한다.
그래야 어떤 일은 좀 요령있게 막아가면서 그나마 혜랑이를 지켜줄 수 있기에 그랬다.
그 무렵, 소복의 은밀한 제안이 몇몇 기생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 몇몇 가운데 하나가 나였다.
소복은 내게 뜻과 재주가 맞는 이들이 마음을 합하여 극단을 시작하자고 했다.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소리, 춤, 악기 등을 좀 더 발전시키고 연구하여
그것을 일부 기방 손님이 아닌 많은 이들에게,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일정 값을 치르면 어린이든 노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자고 했다.
누구에게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자고 했다.
예술과 관련없는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함 없이 오로지 공연만 할 수 있다는 그의 꿈이
내겐 매혹적이고, 그의 제안에 힘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내게 있어 소복은 믿을만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혜랑에게 좋은 제안 될 것 같아서
나는 혜랑에게 기방을 떠나 차라리 소복이 꿈꾸는 극단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랑은
-너는?
하고 물었다.
-소복 언니를 따르고 싶긴 해.
내가 대답했다. 그러나 혜랑이 싫다고 하면 나는 결심을 달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혜랑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가면 나도 가.
그렇게 내가 혜랑이를 매란에 데리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오히려 기방보다 여기서 기생일을 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기방은 사업부란 것이 있어 소위 말하는 ‘해결사’ 아재들이 있었다.
그들이 금전에 대한 부분, 고약한 손님들을 응대하는 것 따위를 해결해 주었으므로, 우리는 눈치를 봐가며 대충 빠지면 되었다.
그러나 매란은 그 정도까지 사업부를 꾸릴 형편이 안 되는데다가 오로지 고대일, 그 작자에게만 의존하고 있으니 일이 해결되기는 커녕,
공연까지만을 우리의 역할로 선을 긋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점점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갔다.
혜랑은 어제도 고 부장에게 짜증을 내며,
-손님도 좀 수준이 되는 인간들을 받아. 돈 준다고 다 들이밀지 말고.
어제 손님에게 수차례 손목을 잡히느라 혜랑의 가는 손목에는 멍이 가득했다.
물론 내게도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지만 혜랑에게 유독 잦고,
일을 나가서 그런 일을 겪으면 혜랑은 무척 힘들어 했다.
가끔 너무 힘들다고 펑펑 우는 혜랑이를 보며 나는 마음이 아프지만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혜랑이를 위해 매일 새 손수건을 준비해 다니다가 혜랑이 눈물이 터지면 내미는 것.
그게 내가 혜랑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고 부장은 언제나처럼
-아니, 나도 잘 할라 그르지.
하며 하나도 잘 할 생각이 없는 태도로 잘 해보겠다는 의미 없는 말만 연발할 뿐이다.
소복은 분명 고부장에게 공연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손님에 대해 결코 용납하지 말라고 했지만, 막상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일부러 더 그런 작자들을 끌어들이고, 몇몇 우리와 생각이 다른 언니들을 꼬드겨 이상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들 사이에는 돈이 오고 가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소복이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소복에게 알려봤자 고 부장을 자르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초반에 잠시라고 했던 기생일이 거의 2년이 다 되어간다.
예기 과정을 끝내고 기방에서 제법 대우를 받기 시작하던 나와 혜랑을 비롯하여 꽤 많은 언니들이 소복의 말을 믿고 함께 국극단을 시작했지만,
아직 우리는 연습만 할 뿐, 첫 공연조차 무대에 올려보지 못했다.
낡아빠진 일본식 다다미 방에서 두 세명씩 한방을 쓰며 어렵게 버티고 있었지만
몇몇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 중 하나가 혜랑이었고, 나는 그것이 무척 신경이 쓰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상황이 좋아질 것 같은데.
요즘 혜랑은 계속 얼굴 빛이 어둡다.
저런 얼굴로 얼마 못 버티다가, 국극단을 떠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벌써 우리가 공연하기로 약속한 요릿집에 들어가자마자,
눈빛이 기분 나쁜 한 사내가 혜랑에게 끊임없이 추근대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 작자는 혜랑의 옷 속에 강제로 손을 넣으려 했고 이에 놀란 혜랑이 그를 강하게 밀어 냈다.
주제에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는 혜랑에게 손찌검을 하려 하였고,
나는 순간 눈에 불꽃이 튀어 가야금으로 그 작자의 이마를 내리치고 말았다.
그의 이마에 피가 솟구쳤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흥분이 되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혜랑에 대한 거칠고 상스러운 말때문인지,
나는 다시 한번 더 가야금을 들어 올렸다.
-안 돼, 옥경아. 안 돼!
놀란 혜랑이가 다급하게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 돼, 옥경아. 너 죽어…안돼…
나를 끌어안고 있는 혜랑의 놀란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그 아이 심장뛰는 소리가 마치 내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나는 혜랑의 얼굴을 감싸며 물었다.
-괜찮아?
혜랑은 고개만 끄덕끄덕 한다. 놀란 눈이 눈물로 가득하다.
그제서야 다른 언니들에게 이 사실을 듣고 황급히 뛰쳐 들어온 고부장은 우리에게 눈을 부라리며 어서 나가라고 눈짓을 했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그의 얼굴을 천으로 덮으며
-아이고, 선생님. 빨리 병원 가셔야죠. 이 잘생긴 얼굴에 흉이 생기면 큰일입죠. 아 그렇죠, 저년들이야 뭐 제가 나중에 잡아도 늦지 않습니다. 병원부터, 자자…병원부터,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그렇죠, 그렇죠. 예, 예 걱정 마세요. 제가 저것들 아주 경을 치고, 선생님 앞에 붙들어 오겠습니다. 어휴 피가 많이 나네.
그러면서 다른 언니들에게
-뭐해, 빨리 부축해드려.
하고는
-너희 둘은 집에 가서 딱 붙어 있어. 집에 가서 보자.
하며 조용히 을러댔다.
난장판이 된 요리집을 뒤로 하고 터덜터덜 걸으며
나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혜랑은 걱정이 되는지,
-너 어쩌려고 그랬어. 이제 어떡해…
하면서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그만 울어, 나 안 죽어.
-대일이 아재가 그 사람 경찰이랬다고. 너 우리 같은 목숨이 무슨 목숨인 줄 알아…우리같이 가족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는데…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나는 혜랑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우리가 왜 가족이 없고 돈이 없어. 소복이 언니 있잖아. 그 아줌마가 해결해 주겠지. 우리를 2년이나 부려 먹었는데…어디 눈 먼 돈이라도 있겠지.
내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처럼 말하자
-너 미쳤어? 진짜?
내 너스레에 정신이 팔려 혜랑의 눈에 눈물이 그쳤다.
-어? 울보공주님, 이제 눈물 그쳤네.
-너는 장난이 치고 싶어? 나 진짜 심장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
-나도 알아.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귀에 까지 니 심장 소리가 들리더라. 무슨 심장이 그리 겁이 많냐.
아니, 들린다기보다는 느껴졌지.
어쨌거나 혜랑의 눈에 눈물이 멎으니 그냥 살 것 같았다.
-그 자식 아예 죽여버릴 걸.
놀란 혜랑은 주위를 둘러보고 내 입을 틀어막으며,
-진짜, 미쳤어. 문옥경. 진짜, 미쳤나 봐. 너 혹시 한번이라도 더 그런 소리 해 봐.
그러나 그 일의 뒷처리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소복은 예인이 악기로 사람을 때리냐며 노발대발 했고,
나 또한 우리 치맛속이나 궁금해하고 예인들에게 손찌검이나 하려는 인간들 앞에서 공연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대들었다. 그러려고 우리 불러서 국극단 하냐고.
고 부장이 공공연히 그런 자리 만들어서 단원들 등쳐먹는지 알고 있냐고. 소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중에는 자신이 더 신경을 쓰겠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나도 생각이 짧았고,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그랬다. 죄송하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단장님. 저 사과는 안해요.
소복은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내가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다만, 문옥경 대단하구나. 내가 널 설득한다고 되겠니? 맘 대로 하거라.
그는 합의금으로 매란 전체가 서너 달 일한 만큼의 돈을 요구했다. 그리고 내가 서로 나와 무릎을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나를 연행할 뿐 아니라
매란의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고대일은 미치겠다는 얼굴로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암튼 문옥경 내가 너 이 빚 꼭 갚게 할거다
하며 이를 갈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서너 차례 그 사내에게 접대를 하며 어쨌거나 해결을 봐 주었다.
그 일이 해결 된 후 나는 고대일을 찾아갔다. 그는 짜증을 내며 내게 꺼지라고 했지만, 나는 그와 합의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내 말을 들은 고대일은 기가 차다는 듯,
-야, 니가 뭔데 혜랑이 일을 빼라 마라야? 이거 완전 미쳤네.
-부탁드려요. 혜랑이 몫 만큼 제가 더 뛸게요. 아예 일을 주지 말라는게 아니잖아요. 그냥 단장님 약속대로 혜랑이는 춤추고 노래하는데 까지만 하게 해주세요. 고 부장님, 사실 단장님 모르게 여러가지 일 도모하는 거 알고 있습니다.
고대일은 내 말에 웃음기가 가시고 눈에 살기를 띄었다.
-너 죽고싶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어려운 자리도 마다하지 않을테니, 저도 단장님 몰래 일을 하겠습니다. 당분간 혜랑이는 일을 좀 줄여주세요.
그는 한참을 가만히 눈을 굴리더니,
-너한테 딱 맞는 일이 하나 있긴 있다.
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가 땡기는 일이다. 너 괜찮겠니?
-괜찮아요. 그리고 고 부장님, 제 몫에 대해서는 당분간 생각하지 마세요. 이번 일로 많이 손해보신 것 알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고대일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돌아왔다.
-야, 문옥경. 이거 은근 화끈한 데가 있네. 그래, 그래. 내가 날 잡으면 연락을 주마. 혜랑이는 걱정 마라. 내가 대충 약하게 응? 섭섭하지 않게 시간 짜주게.
하면서 눈을 찡긋하는 고대일에게 나는 간단히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어쨌거나 나와 혜랑은 그 일 때문에 벌로 방도 같이 못 쓰고,
일도 같이 못하게 되어 한참 동안 혜랑이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당시에 나는 국극단과 가까운 쪽으로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돈으로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내겐 굳이 그런 집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모르겠다.
막연하게 나는,
국극단에서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고 우리도 배우로 정식 급여를 받게 되면 합숙소를 나갈 생각이 있었고,
혜랑이에게 같이 지내자고 말할 계획이었다.
혜랑도 나처럼 가족이 없는 아이였기에, 같이 지내자고 하면 기뻐하겠지.
나는 그런 생각으로 정신 없이 바쁘고 일도 더 뛰어야 했기에,
정말 한참 동안 혜랑의 얼굴을 볼 수 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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