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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서일본은 비국민인가? 비축미 방출 차별에 분노... 더 큰 문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일본의 쌀가격 문제... 이 초유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이번달 18일부터 비축미를 방출하기 시작했고 이제 2차 입찰(7만톤)도 시작하며 방출 물량을 늘려가고 있음 도매업자들에 따르면 이렇게 방출된 일본 정부의 비축미는 5kg에 3500엔 정도... 미국 등 해외에 수출되어 팔리고 있는 쌀 가격과 비슷한 수준의 높은 가격이지만 5kg에 4천엔을 넘기며 치솟은 일본 국내 쌀 가격에 비하면야 훨씬 저렴한 수준임 이번에 방출된 쌀은 도쿄 등 수도권 일부 점포에 출하되어 진열되기 시작했고 일본 국민 전체가 비축미 방출로 인한 쌀 가격을 기대하는 중인데... 그런데 수도권에 풀리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그렇다면 간사이 지방은 어떨까? 놀랍게도 수도권이 있는 동쪽과 달리 서쪽에는 비축미가 풀리지 않았음 올해 4180엔까지 오른 간사이의 쌀값은 현재도 그대로임 전문가는 비축미 방출이 마치 전국의 쌀값을 내릴 것처럼 홍보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역차가 존재할 것이라고 지적함 비축미는 일본 각지에 존재하는 약 300여 곳의 창고에 나뉘어 저장되고 있는데 이번에 낙찰되어 시장에 풀리고 있는 건 후쿠시마 등 동일본 지역의 쌀임 결국 그것이 풀리더라도 서일본은 물류비 등이 추가로 들기 때문에 수도권에 비해 비싼 값에 사먹게 될 거라는 지적임 수도권보다 비싼 값에 비축미를 사먹어야 하는 것도 서러운데 더 큰 문제는 아예 비축미가 서일본에는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거임 이곳은 오사카부 야오시에 있는 쌀 소매점 소매점 주인에게 최근 상황을 물으니 도매업자들 자체가 비축미를 구하지 못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고 말함 [소매점 주인] 제가 '비축미 언제 들어옵니까?'라고 물어보면 도매업자들은 '아직 안 들어왔어요'라거나 최종적으로는 '안 들어와요'라고 답하더군요 이곳은 교토 마이즈루시에 있는 또다른 쌀 가게 '마츠모토 베이코쿠' 창업한지 90년이 넘은 노포지만 결국 쌀 공급이 이뤄지지 않아 일시적으로 폐점까지 결정함 '쌀집이지만 쌀이 없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인상적임 실제로 구글에 확인해보면 현재도 휴업중임을 알 수 있고 공식 사이트를 확인해봐도 죄송하다며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나와있음 이 가게는 이번 일로 결국 함께 일하던 직원 5명도 해고했다고 함 정부가 비축미까지 풀고 있는데 정작 현장에서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막장으로 상황이 치닫고 있는 걸까?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본 정부가 비축미를 방출하면 JA전농 등 낙찰업자들이 비축미를 낙찰 받은 다음 도매업자에게 넘겨 시중에 판매되었어야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낙찰받은 사람들로부터 도매업자에게 쌀이 넘어가고 있지 않는 거임 이런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진짜인 건지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간사이 지역에서 쌀 도매업을 하는 29개 회사에 직접 취재를 해봤음 그리고 그 결과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음 비축미를 확보한 곳은 29개 회사 중 대형업체 단 한 곳 뿐이었음 그마저도 실물로 확보한 게 아니고 낙찰업자로부터 비축미를 넘겨받기로 계약을 맺는데 성공한 것이었음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간사이의 쌀 도매업자에게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중임 쌀 자체가 안 오기도 하지만 그나마 확보되는 물량도 전부 대형업자에게 몰려 시장에 풀 수가 없다는 거임 전문가는 그동안 지역에 식량을 안정적으로 제공해온 지역 쌀가게들이나 중소형 슈퍼마켓 등에 비축미의 정보가 가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함 즉, 현재 일본 정부의 비축미 방출 구조가 잘못된 것이고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 정부가 쌀을 싼 가격에 풀어봤자 전농 등 낙찰 받은 놈들이 그 쌀마저 비축하고 시장에 풀지 않는 상황에 그리고 비수도권인 서일본은 비축미 방출에서 소외되는 상황까지... 과연 일본은 이런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고 주식인 쌀가격을 안정화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와중에 간사이에서 유일하게 비축미를 확보한 업체를 신메이(神明)라고 확신하는 댓글 찾아보니 실제로 신메이는 작년을 포함해 정부 비축미 관리 수탁 계약 등을 따낸 적이 수차례 있던데 진짜일까? 선심쓰듯 후쿠시마 방사능 비축미를 풀어도 그것마저 사먹을 수 없는 일본인들아 니들이 뽑은 자민당인데 견뎌야지 ㅋㅋㅋ www
작성자 : 난징대파티고정닉
싱글벙글 조선총독부 역대 총독들 모음
(조선총독은 1대~9대까지 있었지만 사이토 마코토가 3대,5대를 중임했기에 실질적으로 8명이 있었습니다.)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재임 기간:1910.08.29. ~ 1916.10.14.) -1911년 조선병합의 공로로 백작위를 받았다.- 무단통치의 시작의 알린 총독이다.-그의 총독 시절에 행해진 무단통치들1. 헌병 경찰제 도입2. 조선인 태형령 집행3. 토지조사사업4. 회사령, 광업령, 어업령-이후 1916년 제18대 총리대신 취임-1919년 사망 (향년 67세) 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재임 기간:1916.10.14. ~ 1919.08.12.)- 3.1운동을 강경 진압한 총독이 바로 이놈이다.- 조선인 기독교도들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도 이 하세가와 총독이 저질렀다.- 1916년 백작위를 받음- 이후 3.1운동이 일어난 책임을 물어 결국 1919년 해임되었다.- 1924년 사망 (향년 73세) 3대, 5대 사이토 마코토(재임 기간: 3대: 1919.08.12.~ 1927.04.04. 5대: 1929.08.17. ~ 1931.06.16.)-일제강점기가 35년인데 사이토 총독이 혼자서 10년을 차지한다. (거의 3분의 1 수준)-조선 총독 8명 중 유일한 해군 출신이다.- 문화통치의 시작을 알린 총독-문화통치 대표정책들1. 헌병 경찰제에서 보통 경찰제 도입2. 일본 교사, 공무원들의 제복과 칼 착용 금지3. 언론, 출판 자유 보장 (물론 독립 얘기 꺼내면 잡아갔다.)4. 친일파 대거 양성5. 조선인의 지방자치 참정권 부여- 1919년 서울역에서 독립단체 조선 노인 동맹 단 이었던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암살당할뻔한 적이 있다.- 1932년 30대 총리대신 취임- 이후 1936년 황도파 일본 청년 장교단들에게 암살당함 (2.26 사건)4대 야마나시 한조(재임 기간:1927.12.10. ~ 1929.08.17.)- 전임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의 문화통치를 그대로 위임받았다.- 근데 재임 기간을 보면 1년 8개월밖에 안 되는데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1. 1928년 독립운동가 조명한 의사가 조선에서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을 독검으로 찔러버린 사건이 터짐2.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 당시 한 미곡상이 경성에 쌀 거래소 설립을 허가해주는 대가로 야마나시 총독의 측근에게 당시 금액으로 5만 엔의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을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이라고 한다.- 이 2가지의 사건으로 인해 그는 조선 총독 중 유일하게 ‘부정부패’로 해임된다. 이후 전임이었던 사이토 마코토가 5대 총독으로 재부임한다.- 당시 별명이 금권장군이었다고 한다. 이유는 부정부패가 굉장히 심했기 때문- 1944년 사망 (향년 80세)6대 우가키 가즈시게(재임 기간:1931.06.17. ~ 1936.08.04.)- 민족말살정책을 최초로 실시한 총독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조직개편을 하였고 조선의 북쪽 지역에 공업화를 추진했다. (농업 진흥정책, 수력발전소 건설 등등)- 그 외에도 조선 농촌의 소작제 문제가 반일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어느 정도 소작농들의 의사를 반영해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개선한다.- 그 유명한 ‘내선일체’란 말이 바로 우가키 총독 때 만들어졌다.- ‘내선융화’라는 것도 있는데 일본에 있는 박문상에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의 이름을 같이 넣었다.- 이후 중일전쟁이 터졌을 때 조선인들을 동원해 한반도를 전쟁기지로 만들었다.- 1932년 김구가 한인 애국단을 파견하여 우가키 총독을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 2차대전 이후 미군에 체포되었으나 가벼운 처벌만 받고 출소한다.- 1953년 사망 (향년 87세)- 별명이 ‘원숭이’ 였다.7대 미나미 지로(재임 기간:1936.08.05. ~ 1942.05.28.)-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서 황국 신민화 정책, 조선 위안부 정책, 일본식 성명 강요 등을 실시함- 미나미 총독은 역대 조선 총독 중 가장 악랄한 총독으로 유명하다. -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을 빌미로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폐간시키려 했다.- 2차대전 이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고령으로 인해 1954년 가석방되었다.- 1955년 사망 (향년 81세) 8대 고이소 구니아키(재임 기간:1942.05.29. ~ 1944.07.21.)- 역시나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한 총독 중 한 명이다.- 일본식 성명 강요, 한국어, 한국사 교육 금지 등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내선일체 강요, 학도지원병제도를 통해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다.- 1944년 제41대 총리대신 취임- 2차대전 이후 A급전범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감옥에서 식도암으로 사망 (향년 70세) 9대 아베 노부유키(재임 기간:1944.07.22. ~ 1945.09.28.)- 마지막 조선 총독이다.- 1939년 총리대신 취임- 재임 기간이 가장 짧지만, 전임들 못지않은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1945년 총독직을 사임하고 미국의 아널드 소장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1953년 사망 (향년 77세)
작성자 : dnjsxn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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