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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났던 오헝군 야전포병 얘기
독일제보다 낫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기깔났던 305밀리 스코다 중포를 가지고 있던 게 무색하게도 20세기 초의 오헝 야전포병대는 처참 그 자체였음 물론 포병 병과의 장병들은 전문적이고 잘 훈련되어 있었음. 문제는 장비가 부족했던데다 그 질도 좋지 않았다는 것임. 우선 20세기 초까지 오헝군의 주력 화포 중 하나였던 9cm 야포 M75/96은 제식번호에서 알 수 있듯이 조온-나게 오래된 대포였음. 1875년에 첫 선을 보였고 1898년에 현대화되었음 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다양한 육군열강들이 주퇴복좌기를 도입하면서 반동을 잡고 속사 기능을 달성하는 와중에도 오스트리아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가신발톱을 다는 것으로 개량을 끝냈음. 그 덕에 한 발 갈길 때마다 대포가 5미터씩 뒤로 튀어나가는 걸 80cm 정도로 억제할 순 있었지만 그뿐이었고, 차탄을 갈길 때마다 땅을 새로 파서 가신발톱을 묻어주어야 했음. 견인포 출신들은 이게 얼마나 개좆같은 상황인지 바로 이해할 거임. 또다른 문제는 대포 포신이 여전히 청동제였다는 것임. 오스트리아가 강철을 생산할 능력이 없지는 않았음. 제국해군과 영국해군에 스코다 공장이 강판을 납품했음. 그런데 왜 청동을 썼느냐면 간단함. 예산은 없는데 청동은 강철보다 쌌으니까. 물론 그냥 쓴 건 아니고 오토프레타즈 공법(사진)을 미국에서 훔쳐 와서 포신의 강도를 올리기도 하고 나름 신소재라고 여기에 강철-청동이라는 이명을 붙이기도 했음. 그래도 싼 게 비지떡이라고 본격적인 강철포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 1905년이 넘어가는데도 오헝이 이 꼬라지이니 골머리를 부여잡던 독일이 나서서 크루프와 에어하르트 (현 라인메탈) 사를 주선해 주었음. 오헝은 후자의 설계를 구입해서 새로운 대포를 설계하게 되니 이것이 위 사진의 8cm M5 경야포임 그럼 이제 문제가 끝났느냐? 아니었음. 설계야 최신 흐름을 반영해 완전히 뜯어고쳤지만 포신은 여전히 그놈의 강철-청동이었음. 1차 대전이 터지고 나서야 강철제 포신들이 군에 납품되기 시작했음. 구경과 포탄도 문제였음. 명칭에 8cm라고 되어있는 것과 달리 실 구경은 76.5밀리였고 탄종도 딱 두 종류, 고폭탄과 유산탄밖에 없었음. 고폭탄은 다른 나라들이 다 TNT 작약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질산암모늄과 알루미늄을 섞은 암모날 작약을 썼음. 이유는 암모날이 TNT보다 싸서. 거기다 작약량도 고작 120그람밖에 되지 않았음. 동시대 독일 야전포병의 77mm 야포가 작약량 190그람짜리 고폭탄을 썼으니 확연히 대비되지. 유산탄이라고 멀쩡하지는 않았음. 고작 76.5밀리 구경 야포의 유산탄 화력이라 해봤자 보잘것없었으니까. 어쨌거나 8cm 경야포는 오헝 육군 보병연대 소속 경야포 포대에 서서히 보급되었지만 대전 중에도 9cm M75/M96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음 포병연대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음. 오헝 야전포병연대들의 주력화기는 위 사진의 10cm M99 야포였는데 딱 봐도 주퇴복좌기가 없는 개 구닥다리 화포 아니냐? 포신도 똑같이 강철-청동임. 물론 오헝도 문제점은 인식했으니 대체품을 마련하기 위해 뵐러 사와 스코다 사를 불러다 앉혀 놓고 각각의 신형 대포 설계를 검토했는데, 문제는 이게 시발 1차 대전 터질 때까지도 결정이 안 났음. 결국 전쟁이 터지자 그제서야 급한대로 빠르게 군에 대포를 납품 가능한 스코다의 설계를 채택해 새로운 대포를 뽑아내기 시작했는데 그게 이놈, 10cm M14임. 확실히 설계는 현대적이었고 매우 편리한 대포였지만 포신은 또 강철청동이었고 등장도 늦었음. 초도 양산분이 군에 납품되기 시작한 것은 1914년 말, 이미 전쟁이 터진 지 몇 달이 지난 후였음. 1915년이 되어서야 오헝 야전포병대는 M14를 수령받기 시작했음 물론, 구형 M99 역시 전쟁 끝날 때까지 어디선가 계속 쓰였음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음. 오헝 육군이 합동군/란트베어/혼베드의 3개 육군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은 존나게 유명한데, 이게 문제였음.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정부는 10년에 한 번씩 군사를 비롯한 공동업무를 조정해야 했음. 당연히 그 속도는 느렸고 다른 국가들과 같은 급진적 혁신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음. 오헝 육군 전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와 헝가리 혼베드라는 각 정부의 방위군들은 1912년에야 완전한 독립 군종으로 인정받았고, 1913부터 비로소 자체적인 사단 포병연대들을 꾸리기 시작했음 이 편성이 완료된 건 1914년 4월이었음. 1차 대전은 동년 7월 말에 터졌으니 3개월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슨 훈련이 가능했겠어? 정확히 말하자면 혼베드와 란트베어의 사단들은 포병연대까지 포함한 제대로 된 협동을 해본 적이 없었음. 당시 국가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오헝 육군의 포병 교리 역시 전방에서 직사로 화력을 지원하는 것이었는데, 포병연대와 함께 훈련을 해 본 적이 없던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은 포병대를 뒤에 내버려두고 보병대만을 진격시키고는 했음. 그리고 그 결과는 1914년 말의 대참사였음 - dc official App
작성자 : ㅇㅇ고정닉
싱글벙글 1930년대의 도쿄
東京駅도쿄역1914년 개장한 도쿄의 중앙역. 아시아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장려한 규모의 바로크 양식의 역사는 일본은행과 옛 조선은행 본점을 비롯해 일본 각지의 서구식 건축물을 설계한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1854-1919)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동시기 혹은 이후 일본 열도를 넘어 조선반도나 대만섬, 만주 등지에 지어진 비슷한 스타일의 철도 역사들 중에서 가히 으뜸이라 할 만한 건축물.丸の内마루노우치 광장도쿄역으로부터 황거를 향하여 바라보는 풍경. 좌측 빌딩은 일본우선 사옥, 우측은 도쿄해상보험 사옥이다.日本郵船株式會社일본우선주식회사 사옥일본 최초의 해운사이자 미쓰비시 그룹의 원류인, 일본우선(영문명 Nippon Yusen Kaisha)의 1923년에 신축된 사옥.東京海上火災保険도쿄해상화재보험 사옥마찬가지로 일본 최초의 손해보험 및 자동차보험사로서 1879년에 영업을 시작한 기업의 사옥.丸の内ビルディング마루노우치 빌딩이 '마루노우치'라는 빌딩 동리에는 빌딩 외에 주민이 없다. 자동차가 구두 노릇을 한다. 도보하는 사람이라고는 세기말과 현대 자본주의를 비예(脾睨)하는(눈을 흘겨보는) 거룩한 철학인, 그 외에는 하다못해 자동차라도 신고 드나든다. 이상, 수필 <동경>쇼와 시대 말기의 마천루 건설 붐 이전 까지, 즉 전후에도 한동안 일본에서 최대 규모의 오피스 빌딩이었던 건물.帝国劇場제국극장1911년에 마루노우치에 개관한 일본 최초의 서구식 극장.東京会館동경회관1921년에 황거를 마주하여 마루노우치에 지어진, 상류층들을 위한 연회장.歌舞伎座가부키좌1889년 옛 마츠다이라 씨족의 영지였던 곳에 목조 건물로 처음 지어졌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서구 건축에 따라 방재 기능을 갖추되 일본 전통건축의 외양을 차용하여 1924년에 재건된 가부키 전문 극장新橋演舞場신바시극장1925년, 가부키좌 인근에 지어진 현대적인 외양의 가부키 극장으로, 가부키좌가 해당 분야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 보니 가부키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장으로서 자주 사용되었다.日比谷公園히비야공원1903년에 개장한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 뒤이어 1929년에 새롭게 완공된, 테라코타로 마감되어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전형적인 아르데코 양식의 히비야공회당(좌)은 비단 당대의 최첨단 공연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동 대지진의 참화를 극복하여 현대적 대도시로서 재건된 도쿄의 신흥 랜드마크 중 하나로서 그 입지를 구가하기도 했다.히비야 공원에 위치한 운케이 연못.二重橋니주바시마루노우치 광장에서 황거를 연결하는 서구식의 석조 다리쿠스노기 마사시게 기마상14세기 초, 가마쿠라 막부 말기 고다이고 덴노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 사무라이로서 대활약하며 일본사에서 충신의 대명사로서 추앙받는 영웅의 기마상.桜田門사쿠라다몬원래는 도쿠가와 막부의 본거지였던 구 에도 성의 문으로, 당연히 대정봉환 이후는 황거의 문이 되었다. 1860년 막부의 실권자였던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스케가 조정과 상의없이 미국 총영사와 통상조약을 비준했다는 이유로 존황양이파들에게 백주대낮에 살해당한, 이른바 사쿠라다몬의 변이 벌어졌던 장소이자, 그로부터 한 세기 뒤인 1932년에는 도쿄의 황거가 된 성문 밖에서 쇼와 덴노가 대한민국 임정이 보낸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가 투척한 폭탄에 의해 이이 나오스케와 비슷한 운명에 처할 뻔했던 기묘한 장소.警視庁경시청1931년에 신축된, 사쿠라다몬에서 9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쿄 치안의 중추. 왜 하필 이봉창 의사가 여길 무대로 1932년에 의거를 시도했는지 알 법하다国会議事堂국회의사당단문으로 적기 힘들 다사다난한 이유로 1936년에야 제대로 지어진 일본의 정식 국회의사당.기중기들로 뒤덮인 의사당을 담은 해당 사진을 통해 일련의 도쿄 풍경들의 촬영 연대가 그나마 짐작이 된다.文部省문부성 청사위의 경시청 청사, 국회의사당과 같이 관청가 가스미가세키에 위치한, 1933년에 신축된 근대적인 빌딩.明治座메이지좌이름대로 1873년, 즉 메이지 6년에 개관한 유서깊은 극장. 허나 건물은 관동 대지진 이후 현대적으로 재건축된 것이다.日本橋니혼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부터 조성된, 에도의 주요 도로들을 연결해주는 다리. 1903년에 석조 다리가 새롭게 지어졌을 때는 이미 이 일대는 도쿄 제일의 금융가가 되어있었다.니혼바시 거리에 위치한 야마구치 은행(좌)과 산쿄 빌딩(우)시모노세키 기반의 야마구치현 향토 금융기업의 야심만만한 도쿄 지사.銀座긴자에도 막부 시기에 만들어진 은화 주조소에서 이름을 따온, 일본 최고의 번화가.第一生命保険株式会社다이이치생명보험 사옥(우상단)도쿄역의 설계자로서 이미 전술한 다쓰노 긴고가 건축한 수많은 오피스 중 하나로, 다쓰노식 건축의 특징답게 붉은색의 벽돌과 하얀색의 화강암의 교차, 청동 지붕으로 장식이 마무리되는 전형적인 외양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서구 건축을 수학한 영국에서의 인상이 준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부분.三越미쓰코시 백화점 긴자점1673년 개업.미쓰코시 백화점과 마쓰야 백화점白木屋시로키야 백화점 니혼바시점1662년 포목상으로 개업.松坂屋마쓰자카야 백화점 긴자점1611년 영업을 시작한 나고야의 포목점을 기원으로 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의 도쿄 플래그십 매장.美松百貨店미마쓰 백화점東京地下鉄도쿄지하철아시아 최초의 지하철도.제국호텔에서 바라본 도시철도. 이미지의 왼쪽 상단의 육중한 5층 높이 오피스는 그 유명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본사 사옥이다.쇼와도리清洲橋기요쓰바시스미다 강 위를 웅장하게 가로지르는 일본 최초의 현수교마쓰야 백화점 아사쿠사점스미다 강변을 따라 지어진 아사쿠사의 랜드마크隅田公園스미다 공원東京都慰霊堂스미다 강변에 위치한 관동대지진 희생자 추모관上野広小路우에노-히로코지1868년 대정봉환으로 권력을 잃게 된 막부 측 사무라이들의 거점지로서 최후까지 저항이 펼쳐졌던 우에노는 유신 정부군의 진압 이후에 공원이나 박물관 등이 새롭게 조성되면서 근대화된 부도심으로 발전하고 있었다.恩賜上野動物園우에노 동물원東京府美術館우에노 도쿄도미술관일본 최초의 공립 미술관으로 1926년 개장.東照宮도쇼구 신사에도 막부의 창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봉헌된 신사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우에노 공원에 위치한 막말의 대표적 유신지사이자 사쓰마 번사의 동상赤門아카몬원래는 호쿠리쿠 지방의 다이묘인 마에다 가문의 에도의 거처에 있던 문이었으나 유신 이후 마에다 가문의 저택은 시나가와로 이전하고, 원 부지는 도쿄제국대학이 들어서면서 1827년에 지어진 문만 남았다.増上寺조조지 입구泉岳寺센가쿠지사원에 위치한, 추신구라의 등장인물들인 47 낭인의 무덤.아타고야마 터널西新宿신주쿠관동 대지진 이후, 인구밀도가 적던 고지대였던 덕에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신주쿠는 도쿄의 신흥 부도심으로서 1930년대에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乃木神社노기 신사러일전쟁 당시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노기 마레스케 대장 부부를 모시는 신사.明治神宮메이지 신궁메이지 신궁 외원 소재 성덕기념회화관1918년 착공, 1925년 완공.赤坂離宮아카사카 이궁1909년 완공된 바로크 양식의 황태자궁으로, 메이지 중기인 1883년경에 지어진 네오바로크 양식의 연회장 로쿠메이칸(鹿鳴館)의 설계자였던 영국 건축가 조시아 콘도르(Josiah Condor, 1852-1920)의 제자인 궁정 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片山東熊, 1854-1917)의 역작. 정작 훗날의 다이쇼 덴노가 되는 황태자는 궁전의 사치스러운 내외장과 규모, 그리고 생활의 불편함 탓에 애용하지는 않았다고 하며 쇼와 덴노 일가가 황태자 신분일 때 그나마 제대로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전후에는 국회도서관, 영빈관 등으로 전용.靖国神社 야스쿠니 신사 1869년 보신전쟁 당시 사망한 신정부군과 유신지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순국 신사. '야스쿠니'라는 이름은 1874년 신사를 방문한 메이지 덴노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국가의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한다는 의미를 뜻한다고 한다.
작성자 : 코드치기귀찮아서만든계정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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