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애 뉴비 글 처음 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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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밖의 도시에는 어둠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반대로 서하가 있는 스터디룸 안은 전체적으로 흰빛이 감돌았다. 흰색 테이블. 직사각형의 넓은 화이트보드. 흰색 LED 조명. 그리고 흰색 조명을 받아 더욱 빛이 스며든 흰 털을 온몸에 두른 서하 본인까지. 이 방에 흰색이 아닌 것은 네 개의 녹색 의자와 두 개의 주황색 스툴, 회색 벽지, 그리고 서하가 입은 회색 후드티 정도였다.
이번으로 몇 번째지, 서하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생각했다. 아마 이 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을 시작한 지 반년 정도 지났으니 이번이 스무 번째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서하의 경우에는 이 일이 그러했다.
이런 께름칙한 일을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대학을 입학하는 동시에 안 그래도 이미 척을 진 집구석에서 도망쳐 나온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금전이었기 때문이다. 학비와 생계비. 이 넓은 세상에서 서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둘이 전부였다. 마치 망원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도대체 이 사람은 언제 오는 거야…….” 서하는 휴대폰을 잠시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은 채 의미 없는 상념에 잠겼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어쩌면 나한테 주어진 이 능력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비록 내 인생을 촘촘히 꼬아버린 거지같은 능력이기는 해도, 생계를 유지할 수단 정도는 마련해주었으니. 그래,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이 께름칙한 능력에게 말이야.
이 세계에는 소위 ‘이능’ 혹은 ‘능력’이라 불리는 초능력이 존재했다. 이능이 처음으로 발현되었다고 보고된 것은 약 50년 전, 70년대 즈음의 시절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날한시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부여된 이능. 그것은 하나같이 단순하지만 강렬했다고 한다. 손에서 불이 나간다거나, 한 손으로 가볍게 나무를 뿌리째 뽑아든다거나 하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상상만으로 즐겨왔던 능력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 뒤의 이야기로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진부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모든 집단에는 질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능을 부여받은 자들 중 몇몇이 세상을 지배하겠노라 큰소리치며 이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가 이어지길(세상사가 그닥 평화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라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그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제압한 쪽을 ‘히어로’, 제압당한 쪽을 ‘빌런’이라고 명명했다.
서하가 보기에도 이 이야기는 너무나 뻔했다. 바다가 비가 되고, 다시 비가 바다가 되는 당연한 사실처럼. 하지만 현대사 교재가 말하기를, 그 당시에는 꽤나 심각한 일이었던 것 같다—아무래도 전쟁 비스름한 일이었으니. 처음으로 일어난 히어로와 빌런의 교전은 약 2년 동안 이어졌다. 최종적으로는 히어로가 빌런을 거의 멸절시켰지만, 그 싸움으로 인한 국가의 피해가 무지막지했던 것이다.
그 싸움이 국가에게는 큰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일까? 국가는 크게 활약했던 히어로들을 옆구리에 끌어안고서는 ‘영웅관리부’라는 새로운 행정기관을 세우고, 이능을 보유한 자들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관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 관리란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하나의 예시로, 전 국민은 살면서 총 두 번의 ‘이능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 있다. 만 7세가 되는 해에 한 번, 그리고 만 19세가 되는 해에 한 번. 대다수의 이능 보유자들은 첫 이능검사 때 능력이 밝혀진다. 만약 밝혀지지 않더라도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이능을 깨치게 된다.
어릴 적의 서하도 그런 인물을 한둘 본 적이 있다. 한 명은 뉴스에서, 한 명은 서하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서하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한다. 같은 반의 호랑이 한 마리가 껄렁한 학생 하나를 가볍게 제지하려 손을 뻗었을 때, 말 그대로 그 학생이 날아가 버린 날을.
“아…….”
멍청해 보이는 짧은 목소리를. 누구보다도 크게 당황한 그 호랑이의 눈을.
당연하게도 그는 하루 만에 대스타가 되었다. 선생님을 포함한 학교의 모든 인원이 그를 우러러보았고, 시(市)에서는 그의 이름을 건 플래카드를 내걸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였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서하가 이능을 숭배하는 또래의 아이들을 바보 같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히어로가 숭고한 존재라는 점은 서하도 동의하는 바였다. 서하가 마뜩잖게 여긴 점은 바로 이능을 보유하는 순간부터 따라붙는 꼬리표—영웅관리부였다.
이능을 보유한 순간부터 삶은 두 가지 패턴으로 나뉜다. 히어로가 되거나 히어로가 되지 않거나. 서하는 물론 양쪽 모두 싫었다.
서하는 자신이 히어로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히어로가 되는 순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긴 외줄을 타는 것처럼. 아무리 과거에 선대 히어로들이 빌런을 뿌리째 뽑았다 한들, 빌런이 나타나지 않은지 20년이 넘었다 한들, 잠재적 위험을 안고 산다는 건 서하의 취향이 아니었다. 애초에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히어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러한 이능 보유자들은 삶의 제약이 여럿 생긴다. 그들이 언제 빌런분자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들의 일상 한구석에는 어느새 불편한 삶의 절차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자신이 빌런의 싹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생각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영웅관리부와 주변에 계속해서 입증하는 일 말이다. 그것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어린 서하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생 욱신거리는 충치를 안고 살아가는 느낌일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서하였기에 대학 입학 전 겨울방학에 받은 두 번째 이능검사에서, 서하 자신에게 이능이 존재하다고 판명된 순간 누구보다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암호화
이것이 서하에게서 판명된 이능이었다. 서하는 그 당시에 자신의 이능검사 결과지를 손에 든 검사관이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암호화라는 게 무슨 능력일까요?”
2
서하는 며칠 정도 영웅관리부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암호화라는 이능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능이라 하면 눈에 훤히 보이는 능력밖에 없었고, 모두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그렇기에 다소 난해한 서하의 이능은 연구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서하는 반강제로 영웅관리부에 끌려가 정밀검사를 받기 시작했고, 수족관의 물고기들이 어떤 기분인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약 일주일이 지나서야 서하는 영웅관리부의 구석진 개인 사무실에서 검사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사무실 안은 비교적 깔끔했다. 처음 보는 책을 잔뜩 품고 있는 책장과 목재 테이블. 그 위에 자그마한 탁상시계와 커피 두 잔. 화사해 보이고 싶었는지 창문 앞에 놓아둔 화분 하나와 노란 비덴스. 그리고 부담스러울 만치 자신을 노려보는 우락부락한 곰 한 마리.
서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디쓴 아메리카노였다.
“그러니까 제가 가진 암호화 능력이라는 게 컴퓨터 공학 쪽에서 이야기하는 암호화랑 같다는 건가요? 데이터를 알아볼 수 없게 암호문으로 바꾸고, 그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나직한 곰 감사관의 목소리가 울렸다. “우선, 서하 님의 이능은 정보를 알아볼 수 없게 암호문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컴퓨터의 동작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곰은 턱을 한 번 쓰다듬었다.
“컴퓨터의 암호화 과정에서는 아시다시피 특정한 알고리즘이 사용됩니다. 데이터를 암호문으로 치환하는 특정한 키(key)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그걸 뜯어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변환 과정을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서하 님의 키는,”
곰은 검지로 서하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서하 님의 무의식입니다.”
“네?” 서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눈을 찌푸리고 귀를 반으로 접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먼저 이걸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곰은 종이 한 장을 건네고서는 커피잔을 들었다.
1. 암호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임서하(林緖荷)(이하 ‘서하’)와 상대방의 신체가 맞닿아야 한다
2. 암호화가 진행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30분이 걸린다
3. 암호화가 진행될 때 서하는 무의식에 잠긴다—의식을 잃는다
4. 암호화할 수 있는 대상은 사람의 내밀한 부분, 하지만 그 부분은 서하가 아닌 상대방이 결정한다
서하는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세 번이나 반복해 읽었지만, 그래도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서하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특히 4번이 그랬다.
“뭐, 다른 건 알겠는데요.” 서하는 턱을 긁으며 말했다. “여기 4번에 ‘내밀한 부분’이라는 게 잘 이해가 안 가서요. 도대체 뭘 암호화한다는 거에요?”
“저희가 검사한 바로는.” 곰이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밀한 부분. 그러니까, 감정이나 생각, 혹은 마음까지. 그런 것들 말입니다.”
서하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니까, 제 능력으로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을 암호화할 수 있다는 거네요?”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어이가 없어 나온 웃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치죠, 암호화가 된다고. 그러면 암호화된 감정이나 생각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암호문이 됩니다. 글자 그대로. 다시는 꺼내볼 수 없을지도 모르죠.” 곰이 틈을 두지 않고 말했다.
둘 사이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의 밀도가 얼마나 짙었는지 시간을 새기는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 그 무거운 정적을 깬 것은 곰의 헛기침이었다.
“사실 영웅관리부에서는 서하 님을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리려고 했습니다.”
서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요주의 인물이 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몇 번의 심사와 회의가 이어진 결과, 안전한 인물로 분류되셨습니다.”
“제 능력은 수동성이 강해서이기 때문일까요?”
“감이 좋으시군요. 저희가 4번 항목에 기술했듯이 서하 님이 암호화할 수 있는 부분은 서하 님께서 결정하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온전히 신체를 접촉하고 있는 상대방의 몫이죠. 상대방이 간절히 암호화되기를 바라는 내밀한 부분을 떠올릴 때만 서하 님이 능력을 발휘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저는 적확히 상대방이 원하는 그 부분만 암호화할 수 있다는 거네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서하도 헛기침을 했다. 곰의 헛기침에는 전염성이 있나 보다.
“저는 사실상 일반인과 다를 게 없는 거 아닌가요? 능력을 발휘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잖아요. 제가 원한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과 신체를 접촉한 채로 30분이나 의식을 잃어야 하는 건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거잖아요. 이런 능력은 본 적이 없어요. 아무래도 저는 일반적인 이능 보유자와는 많이 다른 거 같은데…….”
“저희도 일단은 그렇게 여기고 있으나, 법률상으로는 이능이 존재한다고 판명된 순간 이능 보유자로 취급됩니다.”
서하는 잠자코 있었다. 이 곰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내뱉지 않으리라.
“마지막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서하 님의 이능을 토대로 검토한 결과, 서하 님께서 히어로로 활동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곰은 그닥 죄송해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서하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3
서하가 그대로 영웅관리부의 요새 같은 건물을 빠져나온 뒤 약 반년하고도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서하의 귀와 꼬리는 어느 때보다도 쫑긋 서 있었다. 지금까지 평생 안고 갈 짐으로 여긴 이능의 활용 방안을 찾은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우연에 불과했다. 마치 눈을 가리고 홀인원을 친 것처럼.
서하는 여느 때처럼 북적거리는 학생회관 식당의 구석진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제일 저렴한 김밥 한 줄과 물을 담은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깜박한 젓가락이 떠올라 그냥 손으로 집어 먹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아니, 너는 지우고 싶은 기억도 없어? 나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불을 뻥뻥 차고 있다니깐?”
자신의 옆자리에서 떠들고 있던 커플의 지나가는 한 마디. 뇌리를 가득 메운 여섯 글자.
기억을 지운다.
그 순간 서하를 관통하는, 시간을 감싼 피복이 벗겨졌다. 그리고 그대로 시간의 관성이 뚝 끊겼다.
기억을 암호화한다.
그래, 기억을. 말끔히. 다시는 꺼내볼 수 없도록.
서하는 직감적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다. 아니, 확신을 가졌다.
곧바로 서하는 털이 묻는 걸 신경도 쓰지 않고 김밥을 거칠게 옆으로 밀어내고는 휴대폰을 켰다. 그리고는 중고거래 및 지역 커뮤니티를 담당하는 앱에 글을 하나 작성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겠다고.
물론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그렇다. 인터넷에서 기억을 지워주겠다는 글을 마주치면, 혀를 차고 넘어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서하는 어쩔 수 없었다. 남들이 뭐라던 쌓여가는 대출금과 지긋지긋한 김밥 한 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썩어가는 동아줄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다.
의외로 서하의 휴대폰은 쉴 틈 없이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미 새에게 밥을 달라고 조르는 새끼 새처럼. 물론 미칠 거면 곱게 미치라는 내용의 메시지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가시 돋친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은 듯했다. 메시지의 사이사이에는 반신반의하면서도 흥미를 보이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날 밤 서하는 학교 앞에서 어렵사리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는 늑대 한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늑대는 검은색 맨투맨과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안색이 어두웠다. 맨투맨과 안색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둘은 짧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흰색이 가득한 스터디룸으로 향했다. 그리고선 금지된 대화라도 하듯 소리를 죽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 선입금 먼저 부탁드려요.” 서하가 말했다.
“네? 지운 다음에 입금하는 거 아녔어요?”
“기억을 지우면 당사자는 그 기억이 지워졌는지 알 방법이 없잖아요.”
“아, 맞네요.”
서하는 입금 알림을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기억을 지우고 싶은 건데요?”
“아……. 그게,” 늑대의 꼬리가 축 처졌다. “제가 얼마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는데, 너무 힘들어서…….”
서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워야 할 기억이 과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물론 늑대에게는 과중한 기억일 지도 모르지만.
“근데, 정말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거 맞아요?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서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최면 비슷한 거에요. 저도 처음 해보고요.”
“네?” 늑대는 미간을 좁히고 서하를 노려보았다.
“안 지워지면 전액 환불해 드릴게요.”
“뭐, 그렇다면야. 근데 이제 뭘 하면 돼요?”
“어……. 일단 손을 마주잡고요.”
늑대는 불편한 기색을 뻗친 털로 표출했지만, 그러면서도 서하와 손을 맞잡았다.
“이제부터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을, 그러니까 여자친구 분과 함께했던 기억만을 떠올리고 계시면 돼요. 아마 30분 정도 걸릴 거고요.”
서하는 문득 자신이 이능을 사용할 때 무의식에 빠진다는 점을 떠올렸다.
“아마 그동안 저는 불러도 대답이 없을 거에요. 집중해야 하거든요.”
늑대는 이미 눈을 감은 뒤였다.
“그럼, 30분 뒤에 봐요.”
직감과 결과의 합치.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어쩌면 대성공이라는 단어로는 이 일의 상업성을 전부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고 서하는 생각했다. 타인의 기억—지워지길 바라는—을 감쪽같이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런 능력은 눈 씻고 세상을 들여다봐도 찾을 수 없다. 이 정도의 독자성이라면, 떼돈을 버는 건 시간문제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해가 지면 다시 해가 떠오르듯이. 서하의 야심 찬 사업은 날개를 달기도 전에 현실적인 문제를 맞닥뜨려 고꾸라졌다.
*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약 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서하는 흰색이 가득 찬 스터디룸에 엎드려 스무 번째(정확하지는 않지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첫 손님을 맞이했던 그 스터디룸이다. 딱히 이 스터디룸 자체가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반년 전과 비교해도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는 인테리어, 공기의 질 그리고 정적. 서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바뀐 건 오직 흘러간 시간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서하는 언짢은 듯 풍성한 흰 꼬리로 의자를 탁탁 내리치고 있었다. 오늘의 손님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분명 만나기로 한 시간은 8시였는데, 지금은 어느새 30분이나 훌쩍 지나버린 후였다. 지금까지 서하가 마주친 손님은 하나같이 자신보다 먼저 스터디룸에 도착해 있었다. 사형선고를 선고받은 듯 초조한 얼굴을 띤 채로.
하지만 이번만큼은 반대였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등록금을 낸 탓에 돈이 궁했던 서하는 그들 못지않은 초조한 얼굴을 띤 채 손톱까지 물어뜯을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늦을 거면 언질이라도 해주던가, 연락도 안 받고.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라고 서하가 생각하던 때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스터디룸의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 건물이 무너져라 소리를 쳤다.
서하가 맨 처음으로 느낀 것은 당혹감이었다. 스터디카페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라니,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내가 가진 상식이 틀린 걸까. 그럼에도 서하는 곧바로 입술 위에 검지를 갖다 댔다.
“여기 스터디카페에요.”
“아아, 네, 그게…….” 그는 방금 전까지 전속력으로 달리기라도 했는지 숨을 고르고는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저한테 죄송할 건 없는데…….”
서하는 그제야 자신과 다른 상식을 가진 눈앞의 인물을 조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종은 호랑이. 한눈에 봐도 거대한 몸집을 지닌 사내—아마 자신과 나란히 서면 제 머리가 어깨에나 닿을 듯했다. 면 티셔츠 위에 드러난 가슴의 윤곽을 보아하니 저 몸은 근육 덩어리겠지. 게다가 베이스와 바리톤 사이의 적절한 중저음의 목소리와 잘 관리가 됐는지 윤기가 흐르는 털. 이거야 원, 비교 불가능이다. 자신이 소형선이라면 호랑이는 크루즈에 비견될 것이다. 물론 그 모습이 하나하나 자신의 취향에 들어맞긴 했다만.
서하의 관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호랑이는 익명성을 사랑하는 듯했다. 검은색 야구모자, 짙게 코팅된 선글라스(눈을 들여다볼 수 없다), 검은색 면 티셔츠와 검은색 반바지. 3월 초에 반팔과 반바지라니, 사모예드 수인인 자신보다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타입인가. 아무튼, 호랑이 특유의 무늬를 포함해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거멓다. 그가 걸친 것 중에서 다른 색을 찾아보라면 흰색 마스크와 흰색 운동화 정도뿐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을 가렸는데도 무언가 부족했을까? 호랑이는 방문을 닫고선 여전히 잔뜩 긴장한 채, 그대로 문 옆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기에 바빴다.
“저기, 그렇게 긴장하실 건 없는데, 여기 앉으세요.” 서하가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아, 어, 넵.”
호랑이는 얼떨떨한 목소리를 내뱉은 뒤에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마저도 엉거주춤하여 서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 지우러 오신 분 맞죠?” 아무래도 비현실적인 인사말이었다.
“네, 맞습니다.”
“근데, 어떤 기억을 지우시려고요?”
“그거…… 꼭 말해야 하는 겁니까?” 호랑이가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아뇨, 뭐, 필수는 아니에요. 그냥 잊어야 하는 기억을 본인에게 명확히 상기시킬 겸 하는 질문이라서, 그러니까, 잘못되면 다른 기억을 지울 수도 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호랑이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네. 근데,”
서하는 턱을 괴고 호랑이의 선글라스에 비친 자신의 두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저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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