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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쿠데타 계획
[한국 군대의 무장해제 외 황제의 일본 移送說 및 宗廟에의 양위 보고] (신문전보 발송 20, July, 1907, 1.00 p.m.) Herald Paris 20일 이른 아침 대궐과 모든 전략지점을 경비하는 기관총과 시의 전체지역을 순찰하는 일본군 기병들의 모습은 소란 진정에 효과가 있었음.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의 흥분은 군 당국의 모든 사전조치에 의해서도 진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함. 다음은 어제 있었던 한국 군대의 폭동으로 큰 화제가 된 사건들임. 즉 군관학교 학생들이 비밀리에 여러 곳에 많은 탄약을 저장한 것이 발견되었고, 한국 군대는 여러 관청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했음. 한국 군대에서 가장 우수한 平壤聯隊가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대궐을 점령할 계획이 발각되어 모든 한국 군대가 무장해제 되는 결과로 귀착되었음. ( ) ( )은 일본당국의 입장에서는 양위는 일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못되며 오직 계획 중 제1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취했음. 황제가 일본으로 이송된다는 풍문이 되살아나자 바로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감정을 세차게 요동치게 했음. 아직까지는 伊藤과 林은 東京政府의 계획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황제의 이송은 분명 아마도 그가 섭정하여 황태자를 조종할 우려에 비추어 그 실현성을 노리고 있을 것임. 오늘 아침 일찍이 대궐의 고위관리가 종묘에 보고하여 황실 조상들의 신령들에게 정식으로 왕위의 변화를 알리고 지금 즉위식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음. 군사령부는 어제의 폭동으로 일본인 피살 10명, 부상 30명을 발표했음. 한국인은 피살 4명 외에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는 분명 극소수 한국 군인을 제외하고는 사상자의 정도를 감추기 위한 것일 것임. 폭동에 참가한 한국인들에게는 돌멩이 외에는 무기가 없었음. Ohl. 저번에 대한제국군 각 부대의 최후를 조사하면서 지나가듯이 시위 제2연대 3대대가 고종 구출 계획을 꾀하다가 실패했다고 언급한 적 있었음. 그런데 좀 더 살펴보니 이건 훨씬 거대한 사건이었음. 우선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기로 결정했고 친일내각이 고종을 마구 압박하기 시작함. 이 소식은 당연히 사회에도 널리 퍼져나갔고 한국군도 이 소식을 들음. (하늘의 혈맥 중에서) 이 와중에 일본이 고종을 폐위시킨 후 일본으로 압송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서울의 민심과 한국군 장병들의 군심이 상당히 악화되었음. 미우나 고우나 고종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처럼 40년 넘게 제위에 올라 한국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고 이 때문의 고종의 강제퇴위는 국가의 진정한 멸망으로 간주되었던 것임. 그러자 시위 제2연대 3대대 주도로 경운궁 및 각 관청 장악 계획이 준비되기 시작했음. 연관 관료들로는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 외 4인의 고위 군 장교들이 있었음. 연성학교 학생들도 가담한 모양인데 생도들은 무기와 탄약을 곳곳에 옮겼다고 함. 통감부문서에서는 이 음모의 중심으로 고종을 지목함. 친일내각이 양위를 협박하려 어전에 모여 있는 틈을 타 시위연대를 경운궁으로 호출, 친일파 대신들을 싸그리 쓸어버리고 양위를 저지하려던 계획이었음. 통감부 문서에서는 한국군이 명확하게 친일 대신들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됨.하지만 계획 실행 직전 친일내각의 군부대신 이병무(위 사진 속 새끼)와 법부대신 조중응이 눈치를 까고 경운궁 궐내를 탈출했음 이들은 밤 11시부로 남산의 통감 관저로 달려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고종과 시위연대의 쿠데타 계획을 알렸고 이토는 즉각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로 하여금 서울 내에 있던 제51연대 3대대를 경운궁으로 급파함. 일본군은 한국군의 공격 30분 전에 간신히 궐내를 장악하고 기관총을 설치한 다음 포덕문을 걸어잠궈 한국군의 계획을 저지했음. 이도재 등의 양위반대파 대신들은 역공을 당해 체포당했고 말임.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 하에 예정대로 양위는 마무리됐음. 이날로 대한제국군에게 나라는 망함. (76) [양위 후의 한국 정세 및 對韓정책 稟申 件] 往電第八○號 電信案 明治四十年七月二十二日 統監 珍田 外務次官 林 外相으로부터 西園寺 首相에게 현재 京城의 형세를 보건대 원래 先帝는 閣臣의 권고에 따라 그 본심이 아닌 양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이후 여러 가지 음험한 수단으로 군주권을 회복하려고 기도하는 듯함. 다음의 사실은 즉 이것을 증명하는 것임. 첫째, 閣臣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18일 조칙에서 양위의 의미를 명백히 하려는 閣臣의 요구에 대하여 先帝는 이를 거부하고 굳이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시킨다고 운운하는 문자를 내놓게 했다고 말함. 이 일은 선례를 들어 일본에서 사용하는 ‘대리’의 글자와 다른 의의가 있다고 설명하지만 필경 섭정의 뜻이며, 실은 先帝가 후일 君權을 회복하기 위하여 미리 발판을 만들어 두려고 하는 내심을 가진 데 따른 것임을 의심할 바 없음. 朴泳孝 등이 이미 이 설을 주장한다고 함. 둘째, 양위 조칙을 공포한 날 밤에 先帝가 시위대(한국 근위병)를 궁중에 부른 것은 그 진의가 병력으로 閣員을 진압하여 시의에 따라서는 이를 살육하려고 꾀한 데 있었다는 증적이 현저함. 다만 이 거동은 통감의 명에 의하여 한국 병정 출동 예정시각 약 30분 전에 우리 군대를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겨우 이를 방지할 수 있었음. 셋째, 朴泳孝는 지난 18일 先帝에 의하여 궁내대신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사퇴하고 어제 양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閣臣은 이를 처벌할 것을 청했더니 차제에 불길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하고 다만 사직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을 총리대신에게 명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20일, 즉 양위 후 이틀 후에 同 先帝는 朴泳孝를 궁내대신에 親任하는 식을 올렸으나 閣臣은 조금도 이를 알지 못했음. 위 외에 군대의 동요와 난민의 폭거 등은 先帝의 사주에서 나왔거나 혹은 先帝의 뜻을 받들어 일어나는 것으로 직간접으로 내각대신의 사업을 저지하고 방해하려고 도모하는 것이 명백함. 요컨대 현재의 형세는 한편으로 先帝는 음험한 수단으로 군주권을 회복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閣臣은 新帝를 옹립하여 정부를 유지하려고 하여 아직 전쟁은 없지만 사실 君位 쟁탈, 즉 내란의 정황에 있음. 그리고 先帝는 다년간 국가의 군주였으므로 威福에 의하여 많은 방면에 다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내각대신은 다만 일본의 후원을 믿고 있을 뿐으로 달리 신뢰할 만한 실력이 없음. 그러므로 우리의 보호가 없다면 현 내각원은 결국에는 先帝의 음험한 수단 때문에 멸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임. 일이 만약 이에 이른다면 한국은 무질서·무정부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며, 일본은 이를 간과할 수 없어 병력으로 간섭할 필요가 생기게 될 것이므로 지금을 위해 도모하건대 우리 원조로 수립된 현 내각을 보호하고 新帝를 옹립시켜 先帝가 음험한 수단을 행하지 못하는 정부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이 우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방책이라고 생각함. 사정이 위와 같으므로 이번 사건에 관한 협상 담판은 아직 이를 개시할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 일의 진행상황을 관망하면서 시기가 되는 것을 기다려야 함. 어쨌든 지금 2~3일 정도 경과하면 형세의 발전이 다소 명백해질 것이므로 그 모양에 따라 本官의 진퇴에 관하여 다시 廟議를 괴롭히는 바가 있을 것임. (7월 20일 경운궁을 퇴궐하는 이토) 그 다음 날에도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음. 퇴위한 고종에게는 여전히 지지자들이 많았던 반면 친일내각은 일본 외에는 편이 하나도 없었는데, 일본군은 한국 전역, 특히 북방에 분산되어 있었으니까. 고종의 가장 강력한 카드인 한국군은 감축되었더라도 여전히 서울에만 4,500명 가량이 있어서 서울의 일본군 숫자를 웃돌았고 가지고 있는 탄약도 9만발 가까이 되었음. 시위연대의 일부 부대는 무장해제를 거부하며 일본군과 대치했음. 이 와중에 최대 1만명 가량의 대규모 민간인 시위대가 황제 양위에 격분해서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의 집을 불사르는 등의 사건이 벌어지고, 시위 1연대 3대대가 탈영해서 여기 가담해 일본 경찰에 10명의 사상자를 입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7월 21일부터 통감부에서는 부랴부랴 증원군을 요청함. 혼성 1개 여단을 파견해라, 12사단을 불러와라 이런 말들이 오가고, 22일에는 원산에서 일본군 구축함 3척이 1000명의 일본군을 태우고 인천으로 출발함. 이때부터 일본은 한국군 해산을 급하게 준비하기 시작했음. 같은 달 24일 바로 정미 7조약이 체결돼서 한국의 내정이 완전히 통감부 손에 떨어졌고, 일주일 지난 28일에 해산계획이 완성됐음. 8월 1일부터 군대해산이 시작됨. 군대해산 당일 시위혼성여단장 양성환 참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최초로 해산 소식을 들었고 일본은 한국 장병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훈련을 명목으로 훈련원으로 각 부대가 모이도록 했음. 위 사진이 해산 당일 모습임. 경계를 서는 일본군이 있고 저 멀리서 한국군이 해산장으로 들어오고 있음. 하지만 격분한 장병들은 여전히 존재했음. 박승환 참령의 자결을 시작으로 남대문 전투가 발발했고, 그리고 곧 원주진위대와 강화진위대가 잇달아 봉기함. 출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통감부문서 - dc official App
작성자 : HK885고정닉
2주년을 맞이한 수단의 잊혀진 전쟁
https://youtu.be/UWG1anEqaOE?si=2wZtQEki0K19xnce 정확히 2년 전, 수단에서 내전이 터졌다.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지금은 트럼프 행정부에 집중할 동안, 수단은 아직도 끝이 안 보이는 내전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한 늙은 독재자의 권력욕과 두 장군의 라이벌리, 수단 사회의 모순으로 촉발된 이 전쟁은 나라를 두 쪽 냈을 뿐만 아니라 온갖 국가들의 체스판으로 만들었고, 수많은 국민들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수단은 전쟁과 혼란에 익숙한 나라다. 절대다수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수단 역시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의 반목에 시달렸다. 그 중 하나는 남수단이었는데,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수단 북부와 큰 접점도 없었고, 종교 역시 대부분 기독교를 믿어 이슬람이 압도적 주류인 북부와 정서적 괴리가 심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서부의 다르푸르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여러 주민들은 종교는 이슬람을 믿지만, 대부분의 (북)수단 사람들과 다르게 아랍 피가 섞이거나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아 비-아랍인으로 분류되었다. 이들 역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수단 주류와 차이가 있었고, 그들에게 차별을 받았다. 수단 공화국은 오랫동안 이 두 지역과 분쟁을 겪었다. 남수단과 다르푸르는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지배하는 중앙정부의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남수단 지역은 1950년대부터 거의 내내 독립 전쟁을 진행했고, 다르푸르 지역도 2000년대 초반부터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수단을 비교적 최근까지 다스린 사람은 오마르 알 바시르라는 이름을 가진 잔인한 독재자이다. 1989년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바시르는 이슬람 종교법인 샤리아를 전국에 도입시켜 이슬람 독재 체제를 수립했고, 내부의 정적들을 폭압적으로 탄압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남수단과 다르푸르 지역에 잔인한 학살을 감행했다. 정적을 많이 만든 바시르는 쿠데타나 혁명을 방지하고 자신의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한가지 묘책을 썼다. 그는 공권력과 군사력을 특정 기관에 몰아주는 대신 여러 개의 기관에 분산시켜 이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자신 없이는 작동하지 못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곧 수단의 주요 기관들은 바시르를 위해 충성 경쟁을 하게 되었고, 바시르는 경제 실정과 국제적인 제재, 그리고 남수단 지역의 분리독립 같은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약 30년간 권좌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 바시르가 권력 안정을 위해서 새롭게 만든 조직 중 하나가 바로 신속지원군(RSF)이었다. RSF의 전신은 수단 서부 다르푸르 지역에서 반군을 지지하는 비-아랍계 시민들을 잔인하게 약탈하고 학살하던 친-정부 ‘잔자위드’ 민병대였다. 2013년 공식적인 정부 기관이 된 이들은 바시르의 수단 정규군 (SAF) 약화 정책과 함께 점차 위상이 높아져 사실상 수단 정부군(SAF)과 별개로 움직이는 제2의 군대가 되었다. 이들은 예멘 내전에도 파병되었고, 다르푸르 외의 다른 국내 반란 세력들을 진압하기도 했다. RSF의 지도자는 모하메드 함단 단갈로, 일명 헤메티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헤메티는 바시르의 충성스러운 심복으로 일하면서 RSF의 위상을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금을 비롯한 각종 광물 자원에 대한 이권도 얻으면서 사실상 군벌이나 다름없는 입지를 얻게 되었다. RSF는 장비를 현대화하고 실전 경험을 쌓으며 병력도 많이 확보하면서 군사적으로 정규군과 거의 동등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한편, 굳건하게 버티던 바시르 정권은 2019년 위기에 봉착했다. 30년의 폭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시민들은 대대적으로 바시르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열기를 체감한 RSF의 헤메티는 몰래 바시르를 끌어내릴 음모를 꾸몄고, SAF의 압델파타흐 알 부르한 중장을 포섭했다. 서로 견제하라고 만든 두 기관이 협력하자 30년을 버텨온 바시르도 어쩔 수 없었다. 두 장군은 2019년 4월 마침내 힘을 합쳐 쿠데타를 일으켜 바시르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부르한과 헤메티는 처음에 수단 민중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는 척 했다. 이들은 수단 야권과 함께 권력을 나누는 기구를 만들었고, 민정 이양을 약속하는 타임라인을 제시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하게, 실제로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2021년 두 장군은 다시 한번 정부를 엎어 자신들의 군사 독재정을 수립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반대파를 제거한 두 장군은 점차 서로를 껄끄러워 하기 시작했다. 두 인물 모두 야심만만했고 권력을 얻고 싶었다. 다른 사람과 권력을 나누는 것은 그들에게 맞지 않았다. 특히 상대가 자신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다. RSF와 SAF는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그보다 덜 알려지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두 집단의 지지 기반의 차이였다. 정통 군대인 SAF는 수단의 중심지인 나일강 유역 중산층과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고, 이슬람주의자들과도 사이가 매끄러우며 여러 민족들이 함께 어우러진 기관이다. 반면 헤메티를 비롯한 RSF는 대부분 그동안 소외되었던 서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나일강 엘리트에게 오랫동안 무시당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고 이슬람주의자들에 더 적대적이며 자신들과 다른 민족들에 대해 배타성이 강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대변하는 두 집단은 협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서서히 충돌의 길로 걸어가던 두 장군이 공개적으로 적대하게 된 계기는 군대 통합 이슈였다. 부르한 장군은 미국의 제안에 따라 신속지원군을 수단정규군에 통합시켜 국가 권력을 안정시키자고 했고, 헤메티도 겉으로는 동의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흡수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부르한은 2년 안에 통합을 마치자고 했으나, 헤메티는 10년이라는 시간을 요구했다.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군대 통합과 관한 이견이 점점 커지자 수단 전역에서 SAF와 RSF 병력이 각각 집결했고, 군사적 긴장감이 감돌았다. 결국 2023년 4월 15일, RSF가 하르툼 공항의 SAF 항공기들을 포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초 쿠데타 시도로 여겨진 이 충돌은 전국적으로 번지면서 피 튀기는 내전으로 장기화되었다. 며칠 뒤 혼란이 가라앉으면서 전선의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도 하르툼과 그 쌍둥이 도시 옴두르만이 주요 격전지가 된 가운데, 대체로 각자의 기반에 따라 RSF가 서부, SAF가 동부를 차지한 형국이었다. 중동과 아프리카 모두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수단은 피냄새를 맡은 상어들을 끌어들였다. 수단 서부는 최근 들어 금광이 대거 개발되었고, 중부의 나일강 유역은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으며, 홍해에 접한 동부 해안가는 대형 항구 포트 수단이 존재해 해상 안보와 무역 거점을 확보하는데 유용하다. 역내 각국은 손익을 따지면서 수단 내전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RSF의 최대 뒷배는 바로 걸프만의 왕국 UAE다. 최근 UAE는 역내의 각종 분리주의, 반군 세력들을 지원하면서 그 대가로 항구나 자원 같은 이권을 취하고 있다. 수단에서 UAE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RSF의 금인데, UAE는 요 근래 (합법과 불법을 가리지 않는) 국제 금 거래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UAE는 여기에 더해 가능하면 RSF의 승리 이후 항구도시 포트수단의 이권까지 얻고 싶어한다. UAE는 피 묻은 황금을 대가로 RSF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있고, 후술할 RSF의 다른 지지자들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UAE가 주된 물주 역할이라면, 차드는 그 물자를 수송하는 중개 상인이다. 사태 초기에 수단 군부를 지지하는 듯 했던 차드는 이후 재빠르게 편을 바꿔 RSF를 지지하고 있다. UAE는 차드 동부의 공항을 통해서 무기를 가져오고 그 대가로 금을 가져가며 수익의 일부를 차드 정부에 찔러주고 있다. 이런 금과 무기 거래에는 러시아의 유명한 용병대 바그너 그룹도 연루된 듯하다. RSF와 몇 년간 협력한 바그너 그룹은 아프리카의 광물 개발에도 관심이 많아 광산 이권 확보에 주력했다. 바그너는 내전 발발 이후 공식적으로 철수했다고 알려졌으나, 여러 보도에 따르면 여전히 금광 산업과 무기 거래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밖에 리비아 동부를 차지한 군벌 LNA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정부도 RSF를 지지하고 있다. 두 세력 모두 바그너 그룹과 계약하고 있으며 RSF와 맞닿아 있기에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기에 용이하다. 한편 에티오피아는 자국이 나일 강 상류에 짓고 있는 댐 문제로 인해 수단 군부와 사이가 안 좋아 RSF를 지원한다는 의심을 받는다. 남수단 독립을 지원하며 수단 정부와 수십년간 대립한 남쪽의 우간다도 UAE가 자국을 이용해 무기를 수출하는걸 허용한다고 알려졌다. 동아프리카의 민주주의 국가 케냐 정부 역시 헤메티와 회동하는 등 그를 외교적으로 지지하고 있는데, 그 대가로 UAE의 투자를 약속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SAF 역시 다양한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다. 헤메티에게 UAE의 왕족들이 있다면, 부르한에게는 딱 백 년 전, 수단이 이집트 영토던 시기 아예 SAF를 창설하고, 이후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이집트 군부 정권이 있다. 이집트군은 비밀리에 각종 군수물자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첩보도 공유하고 있고, 공습 지원과 군사고문단 파견은 물론 심지어 SAF의 군사작전과 전략 분야마저 깊게 관여하고 있다. 이집트 측은 SAF에게 하르툼을 절대로 내줘서는 안되고 타협을 시도하지 말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수단군은 우습게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부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특수부대들은 바그너 그룹을 공격하기 위해 수단에 침투해 SAF와 협력하여 바그너 대원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것을 돕고, 첩보를 제공하고 공군 유지보수를 지원하기도 한다. 한편 러시아는 전쟁 초기 바그너의 성향대로 RSF에 기울었으나, 2024년 들어서 정부 차원에서는 오히려 SAF에 가까워졌다. 러시아는 SAF에게 포트 수단에 조그마한 해군기지 하나를 25년간 유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바그너 그룹과 대척점에 서서 우크라이나와 같은 배를 타게 된 것이다. 평소에 서로 경쟁 관계인 중동의 강국들 이란과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모두 이번에는 같이 SAF를 지원 중이다. 이란과 튀르키예 정부는 각각 자국의 주력 방산품인 마헤르와 바이락타르 드론을 판매하면서 SAF의 전력을 보강하고 있다. 전쟁 초기 중재자 역할을 시도한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점점 노골적으로 SAF를 편들고 있다. 거의 전국토가 모래로 뒤덮인 이 마법의 왕국은 수단 나일강 유역 농지 일부를 자국 식량 안보를 위한 도구로 임대했는데, 그 중요한 전략 자산을 약탈자들로부터 지키고자 한다. 그 밖에도 카타르는 UAE와의 오랜 라이벌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국제 이슬람주의 네트워크를 후원하는데 관심이 많아 SAF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에티오피아와 분쟁 관계를 유지해온 끔찍한 독재국가 에리트레아는 UAE가 에티오피아를 지원하고 있다고 판단, 이웃한 수단에서 RSF가 승리하여 UAE가 후원하는 세력에게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SAF를 지지한다. 마찬가지로 얼마 전 에티오피아 중앙정부와 전쟁을 겪은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족도 SAF에 대량으로 가담해 싸우고 있다. 전쟁 초기에는 RSF가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금광 수익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꾸렸으며 최근 전장에서 더 많이 활약한 RSF는 SAF보다 정예병이 더 많았고, 황금을 통해서 추가 병력을 모집하는게 수월했다. 여기에 선제 공격을 한 이점도 있었다. RSF는 당초에 계획했던 신속한 정권 장악에는 실패했지만, 전쟁 초기 수도 하르툼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SAF 수뇌부를 동부 항구도시 포트 수단으로 피난가게 만들었다. 서부 지역의 SAF 점령지 역시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미국과 사우디의 중재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전쟁은 격화되었다. RSF는 계속해서 전선을 밀어붙였고, SAF는 조금씩 후퇴했다. SAF는 하르툼과 그 쌍둥이도시 옴두르만에서 주요 거점을 빼앗긴 채 불리한 싸움을 이어가야 했고, 지지 기반인 나일강 유역에 적군의 침투를 허락했다. SAF의 내부에서는 부르한 장군이 책임지고 내려와야 한다는 여론도 일어났고, 일각에서는 아예 지금이라도 RSF와 협상해서 나라를 동서로 분할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SAF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구 오마르 알 바시르 정권의 엘리트층과 연합했다. 바시르 정부의 여당이던 국민의회 소속 인사들과 보수적 이슬람주의자들, 관료들이 협조를 선언했다. 또한 RSF 및 수단 정부와 오랫동안 교전해온 서부 다르푸르의 여러 반군 단체들과도 임시 동맹을 꾸렸고, RSF의 진군에 불안해하던 부족들에게 접촉해 이들의 민병대도 동원했다. RSF 역시 남수단 독립 이후에도 수단에 남아서 정부와 싸우던 남수단계 반군 세력과 암묵적 동맹을 맺으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한편 RSF는 점령지에 제대로 된 행정과 통치 시스템을 도입하는 대신 착취에 집중했다. ‘추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RSF 병사들은 과거 다르푸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대적인 약탈과 방화, 강간과 학살을 벌이며 주민들에게 끔찍한 전쟁 범죄를 시전했다. SAF 세력 역시 전쟁 범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이슬람주의 민병대들이 심했다. 그러나 도적떼와 비슷하게 행동하던 RSF에 비하면 세 발의 피였고, 국민 다수의 여론은 그래도 RSF보다는 SAF가 낫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2024년 말이 되자, 내전의 형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하르툼과 동부 지역을 공격하는 RSF 병력들은 점차 보급선이 늘어지고 수단 공군의 폭격이 강해지면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 또한 이들의 근거지인 서부에서 오랫동안 이들과 싸워온 다르푸르 민병대들이 SAF와 손을 잡고 RSF를 괴롭혔기 때문에 병력과 물자를 동부의 주요 전장 말고 서부에도 대거 투입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신규 점령지가 줄어들고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약탈 물자가 감소해 줄어든 파이를 둔 내분도 일어났고, 이에 질린 여러 병사와 지휘관들이 대거 SAF에 투항하기도 했다. 반면 SAF는 여러 민병대들의 연계를 강화시켜 이들을 전보다 훨씬 효율적, 유기적으로 전선에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이란과 튀르키예에서 구입해온 드론 부대 역시 힘을 발휘해 SAF의 공군력을 보탰다. 수단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사회 역시 그래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군부가 전혀 모르는 도적떼보단 낫다며 SAF를 차악으로 지지했다. 설상가상으로 RSF의 횡포에 질린 민간인들 역시 대부분 SAF를 지지하며 RSF 점령지, 특히 나일강 유역 점령지에서 민병대를 꾸려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SAF에 가담하는 식으로 RSF를 괴롭혔다. 2024년 9월부터 시작된 SAF의 대대적인 반격 작전은 전황에 매우 결정적이었다. SAF는 나일강 유역을 공격한 RSF를 격퇴해냈고, 수도 하르툼을 완전히 탈환하기 위해 북쪽에서부터 근교를 장악한 RSF를 밀어냈다. 이후 2025년의 대대적인 공세에서 하르툼은 완전히 해방되었다. RSF 대원들은 헤메티의 사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웃한 도시 옴두르만이나 서부 지역으로 패주했다. 수도를 탈환하고 승기를 잡은 부르한은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자신의 승리를 과시했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헤메티는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다. SAF는 하르툼에 이어 옴두르만의 RSF 병력을 제거하고 있고, RSF 대원들의 사기는 연이은 패배로 크게 떨어졌다. 그동안 소극적으로 RSF를 지원하던 우간다는 최근 RSF와 거리를 두고 있고, 차드 역시나 내부적으로 RSF와 손절하자는 여론이 커지면서 흔들리고 있다. 전장에서의 패배가 사기 하락과 탈영으로 이어지고 우방들의 신뢰마저 해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머지않아 SAF의 승리로 끝나리라 확정할 수는 없다. RSF는 여전히 수단 서부 지역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고, 2월에는 이 점령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국제 사회에 정통성을 호소할 겸 대립 정부를 선포했다. 또한 지금껏 전쟁을 피해간 SAF의 근거지인 북부를 향해 새로운 공세를 명령했고, 상술한 남수단계 반군과의 동맹을 공식화하며 반격을 노리고 있다. 현재 SAF는 거대한 빅텐트 집단이라 내부 분열의 가능성도 큰데, 실제로 작년 말 주요 이슬람주의 종교 지도자가 부르한 장군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군부 수뇌부와 이슬람주의자들의 불편한 동거가 흔들렸다. 두 세력 모두 평화 협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전쟁의 빠른 종식을 회의적으로 만든다. 애당초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았던 부르한과 헤메티는 더 이상 서로를 믿지 못하고, 상대방을 군사적으로 박살내는 것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생각한다. 미국과 사우디, 튀르키예 등이 제안하는 휴전 협상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만약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될 경우 두 장군이 실질적으로 나라를 분단하는 평화 협정이 타결될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그조차도 먼 얘기다. 설상가상으로 이 전쟁이 주변국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11년 마침내 수단에게서 분리독립한 남수단은 이후 대통령 살바 키르(오른쪽)와 부통령 리에크 마챠르(왼쪽), 그리고 두 남자를 각각 따르는 여러 종족들 간의 분쟁으로 인해 이번에는 자신들끼리 기나긴 내전을 벌였다. 이 전쟁은 두 남자가 다시 한번 공동 정부를 꾸리는데 합의하면서 수십만명이 죽고 나라를 파탄낼 동안 아무 것도 안 바뀌며 겨우 끝을 맺었으나, 여전히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평화였다. 수단 내전이 격화되자 이 허울 뿐인 평화도 붕괴되고 있다. 가난한 내륙국 남수단은 얼마 안되는 수입의 90%를 수단을 통한 석유 수출에 의존하는데, 이 수익의 절대다수는 엘리트층과 그들을 지지하는 부족민들과 민병대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수단 내전은 남수단의 석유 수출량에 궤멸적인 타격을 줬고, 이는 자원 분배를 어렵게 만들어 집권층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종족 분쟁은 자원이 줄어들면서 더욱 심해져 대규모 혈전으로 이어졌다. 마차르를 따르는 민병대들이 키르의 군인들과 충돌하자, 키르는 마차르와 그의 측근들을 체포하며 가택연금 시켰다. 전운이 감돌면서 키르를 지지하는 우간다군이 수도 주바에 급파되었고, 남수단 전역이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현재 RSF와 연합한 남수단계 반군 세력은 키르 대통령과 친하고, 반대로 SAF는 마차르 부통령과 인연이 있다. 수단 내전으로 인해 붕괴 직전의 위기로 내몰린 남수단이 더시 한번 전면적인 내전을 겪게 된다면, 두 국가의 내전이 하나의 거대한 대전쟁으로 합쳐질지도 모른다. 지역 세력들의 복잡한 관계와 이미 여러 남수단 사람들이 수단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우려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무엇보다도 바로 민간인들이다. 5,100만의 수단인 중 최소 4만에서 최대 15만명이 사망했고, 1,200만명이 국내&국제 난민 신세로 전락했으며, 2,500만명이 현재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SAF와 RSF는 모두 자신들의 군사적 필요에 따라 구호 물품의 전달을 저지해 민간인들의 피해를 늘렸고, 최근 미국 정부의 해외 원조 대량 삭감도 인도주의 위기를 강화했다. 수많은 수단 국민들이 고통에 빠진 채 내전이 언제 끝날지, 일상으로 언제 돌아갈지 걱정하고 있다. 오늘부로 발발 2년차인 수단의 전쟁은 애석하게도 아직 종식까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역내 국가들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복잡해진 전쟁 속에서 SAF가 승기를 잡긴 했지만, RSF도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내전이 질질 끌리면서 나라가 실질적으로 분단되거나, 최악의 경우 남수단에서도 전쟁이 터져 하나의 초대형 분쟁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단의 장군들이 왕좌의 게임을 벌일 동안, 무고한 국민들은 계속해서 고통받고 있다. 참고자료 https://www.washingtoninstitute.org/policy-analysis/reconsidering-cairos-approach-sudanese-civil-war https://www.crisisgroup.org/africa/horn-africa/sudan/battle-khartoum-marks-crossroads-sudans-civil-war https://www.crisisgroup.org/africa/horn-africa/sudan/b204-sudans-calamitous-war-finding-path-toward-peace https://foreignpolicy.com/2025/02/03/sudan-rsf-civil-war-saf-democracy-activists/ https://reliefweb.int/report/sudan/two-years-sudans-war-spreading https://www.csis.org/analysis/new-phase-sudans-civil-war https://www.aljazeera.com/features/2025/3/29/sudans-war-risks-merging-with-conflict-in-south-sudan-say-analysts https://www.newarab.com/analysis/sudan-heading-towards-long-term-civil-war https://mondediplo.com/2024/03/03sudan https://thesoufancenter.org/intelbrief-2025-march-13/ https://www.cfr.org/global-conflict-tracker/conflict/power-struggle-sudan https://www.thenationalnews.com/news/mena/2024/12/08/sudans-civil-war-paves-way-for-political-comeback-of-al-bashirs-islamist-followers/ https://www.wilsoncenter.org/article/conflict-sudan-map-regional-and-international-actors https://issafrica.org/iss-today/could-prolonged-warfare-in-sudan-lead-to-the-country-splitting https://3ayin.com/en/egyptsaf/ https://www.theafricareport.com/371576/opinion-who-is-profiting-from-the-sudan-war/
작성자 : 라파헤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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