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폐허가 된 도시의 골목길은 깨진 유리 조각과 녹슨 철근만이 뒹구는 죽음의 땅 같았다. 그 적막을 깨고, 낡은 건물 그림자 속에서 네 개의 그림자가 불안한 듯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

몽환적인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안대를 낀 소녀, 크롬 도쿠로는 낯선 풍경에 불안감을 느끼며 주변을 더듬거렸다. 그녀의 곁에 드리워진 희미한 환각의 그림자조차 흔들리는 듯했다.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눈에, 커다란 배낭을 멘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하치쿠지 마요이가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동질감을 느낀 크롬은 마요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너도… 길을 잃은 거야…?"

"훗, 꼬맹이, 네가 그 녀석인가? 꽤나 귀찮아 보이는 녀석이군."

능글맞은 목소리가 크롬의 불안감을 비웃듯 울려 퍼졌다. 몽환적인 안개를 희미하게 두른 남자, 시노부는 크롬을 훑어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붉은 눈은 장난기와 위험함이 뒤섞인 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크롬의 뒤에 선 미사카 미코토에게도 잠시 머물렀다. 강렬한 전자기장의 기운을 감지한 그는 흥미롭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하아? 꼬맹이 주제에, 꽤나 건방지잖아. 덤벼보시지."

차갑고 도도한 목소리가 시노부의 빈정거림에 맞섰다. 손끝에서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전투 태세를 갖춘 소녀, 미사카 미코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노부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강력한 전자기장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의 시선은 불안한 듯 떨고 있는 아즈사에게 잠시 머물렀다. 기타 케이스를 든 채 겁에 질린 표정의 소녀에게 왠지 모를 책임감을 느낀 미코토는, 그녀를 보호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길… 잃었어… 어른들… 나쁜 사람… 아니야…?"

커다란 배낭을 멘 채, 불안한 듯 더듬거리며 묻는 작은 목소리가 있었다. 하치쿠지 마요이는 커다란 눈망울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어색한 말투는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낯선 어른들의 분위기에 잔뜩 겁을 먹은 그녀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크롬의 뒤에 숨듯 자리 잡았다.

"저, 저는… 싸우는 건… 싫어요…! 무서워요…! 하지만… 친구들을 지켜야 한다면…!"

그때, 떨리는 작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려 퍼졌다. 기타 케이스를 든 소녀, 나카노 아즈사는 겁에 질린 눈으로 세 사람과 낯선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어깨는 불안감에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코토의 강한 눈빛을 느낀 아즈사는, 자신도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흥, 네 녀석이 무슨 목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방해가 된다면 제거할 수밖에."

시노부는 차가운 눈빛으로 크롬을 응시하며 몽환적인 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는 순식간에 골목길을 뒤덮으며 크롬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자체가 흥미로웠지만, 그의 목적을 방해하는 존재는 가차 없이 제거할 생각이었다.

"시끄러워! 너희들 전부, 여기서 꼼짝 못하게 해주겠어!"

미코토는 강력한 전격을 방출하며 시노부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푸른 번개가 어둠을 찢으며 몽환의 안개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섬광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뒤에 있는 마요이와 아즈사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길… 잃었어… 아파… 무서워…!"

마요이는 갑작스러운 전투에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옆에 있는 크롬의 옷자락을 붙잡고 잔뜩 몸을 움츠렸다.

"…방해하지 마…."

크롬 도쿠로는 희미한 환각을 펼쳐 마요이의 움직임을 봉쇄하려 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동시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시노부의 검은 안개를 주시하며 삼지창을 굳게 쥐었다.

"저,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여러분… 힘내세요…!"

아즈사는 떨리는 손으로 기타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냈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현을 누르자, 불안정하지만 맑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 연주는 싸움터의 긴장감을 잠시나마 누그러뜨리는 듯했다. 비록 두려웠지만, 자신을 격려해주는 듯한 미코토의 시선에 힘을 얻어,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며 연주를 시작했다.

시노부는 몽환적인 안개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미코토의 전격을 피하고 마요이를 공격하려 했다. 검은 안개는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소녀들을 위협했다. 크롬 도쿠로는 환각을 이용해 미코토, 마요이, 그리고 아즈사까지 혼란에 빠뜨리려 했지만, 시노부의 안개 또한 그녀의 환각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미코토는 강력한 전격으로 맹렬하게 저항하며, 동시에 마요이와 아즈사를 보호하려 애썼다. 그녀의 푸른 눈빛은 흔들림 없이 적을 꿰뚫었다. 아즈사의 불안정한 연주 속에서도, 그녀는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을 감지했다.

아즈사의 연주는 점차 몽환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녀의 불안했던 손놀림은 점차 안정되어 갔고, 기타 선율은 싸움터에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몽환적인 선율은 시노부의 검은 안개를 희미하게 만들고, 크롬 도쿠로의 환각에 미묘한 균열을 일으켰다. 미코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강력한 전격을 뿜어내며 시노부와 크롬 도쿠로를 몰아붙였다. 그녀는 아즈사의 연주에 집중하며, 전기가 닿는 순간적인 틈을 노렸다.

치열한 전투는 점점 더 격렬해져 갔다. 몽환과 전격, 그리고 기타 선율이 뒤섞인 혼돈 속에서, 마침내 비극이 찾아왔다. 시노부가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짙은 안개 속에서, 날카로운 그림자가 아즈사를 덮친 것이다. 그것은 시노부가 만들어낸 환영이었지만, 아즈사에게는 현실과 똑같이 느껴졌다.

아즈사의 기타 선율이 멎었다. 그녀의 작은 몸은 마치 붉은 꽃잎처럼 흩날리며, 차가운 바닥에 힘없이 스러졌다. 그녀의 손에서 놓여진 기타는 슬픈 침묵 속에 놓여 있었다. 마지막 순간, 아즈사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미코토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즈사…!"

미코토는 충격에 휩싸여 쓰러진 아즈사의 이름을 절규했다. 그녀의 푸른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아즈사의 흩어진 빛 조각들을 잡으려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격렬한 분노와 함께,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깊은 자책감이 밀려왔다.

시노부는 씁쓸한 표정으로 쓰러진 아즈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빛에는 이전의 냉소 대신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연민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는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었지만, 어린 소녀의 죽음은 그에게도 미묘한 감정의 파동을 일으켰다.

크롬 도쿠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안대 아래 감춰진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후회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즈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무력감에 휩싸였다.

아즈사의 죽음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맑고 순수한 미소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폐허가 된 골목길에는 슬픔과 침묵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요이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쓰러진 아즈사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아즈사가 사라진 자리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찢어진 옷의 잔해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마치 시간을 되감듯 원래의 형태를 되찾아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아즈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그녀의 옷은 여기저기 심하게 찢어져 있었고, 맨살이 드러난 채였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욱 혼란스럽고 불안해 보였다.

"…어… 어떻게…?"

미코토는 경악한 표정으로 아즈사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분명히 소멸했던 그녀가, 마치 환상처럼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아즈사에게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크롬 도쿠로의 눈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찢어진 옷 때문에 드러난 그녀의 창백한 피부는 더욱 가냘프게 보였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절망에 휩싸인 크롬 도쿠로는 무력감에 휩싸여 스스로 자신의 망토를 벗어던졌다. 그녀의 행동은 주변 인물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아즈사에게 다가가 망토를 덮어주려 했다. "이거라도… 입어…."

시노부는 혀를 끌끌 차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저 꼬맹이… 질긴 녀석이군." 그리고는 다시 한번 크롬 도쿠로를 향해 몽환적인 안개를 뿜어냈다. "흥, 방해된다면 다시 없애주지." 그는 아즈사의 부활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냉정을 되찾고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이상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안 돼…!"

미코토가 다급하게 외치며 전격을 방출했지만, 시노부의 공격은 이미 크롬 도쿠로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즈사를 보호하려 했지만, 시노부의 공격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크롬 도쿠로는 벗어던진 망토조차 움켜쥘 새도 없이, 휘몰아치는 몽환의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의지를 끌어올리듯, 그녀는 손에 든 삼지창을 휘둘러 닥쳐오는 안개를 갈랐다.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공격의 궤도를 살짝 틀어놓으며 치명적인 타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녀는 뒤에 있는 아즈사를 돌아보며,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다졌다.

크롬 도쿠로가 간신히 시노부의 공격을 흘려내자, 미코토의 강력한 전격이 몽환의 잔재를 꿰뚫으며 시노부를 강타했다. "얕보지 마!" 미코토는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더욱 강력한 전류를 방출했다. 아즈사가 다시 살아난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이제 망설임 없이 시노부를 공격했다.

시노부는 예상치 못한 일격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능숙하게 몸을 비틀어 치명상을 피했다. "제법인데, 꼬맹이."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걸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시노부의 주변으로 더욱 짙고 불길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는 슬슬 이 상황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한편, 아즈사는 찢어진 옷을 움켜쥔 채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의 소멸과 부활은 그녀에게 극심한 혼란과 공포를 안겨주었다다. "저… 저는…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왜 다시 살아났는지, 그리고 이 낯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요이는 여전히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싸움의 격렬함과 아즈사의 기이한 현상은 그녀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여기는… 정말… 어디인 걸까…?"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끔찍한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크롬 도쿠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노부를 노려보았다. 벗어던진 망토는 차가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의 굳은 표정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났다. 비록 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환각 능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신중하게 움직이려 했다.

"…방해… 하지 마…" 크롬 도쿠로는 낮게 읊조리며 다시 한번 삼지창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희미한 환각의 잔상이 일렁였다. 비록 아즈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더 이상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짜내어, 다시 한번 싸울 준비를 했다.

시노부는 검은 안개를 손짓 하나로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미코토와 크롬 도쿠로를 동시에 압박해 들어왔다. 몽환적인 안개는 시야를 흐리게 만들고, 환각을 일으켜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미코토는 강력한 전격으로 안개를 흩뜨리려 했지만, 검은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재생되며 그녀를 옭아매었다. 그녀는 전기의 방향을 조절하며, 혹시라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크롬 도쿠로는 환각을 펼쳐 시노부의 움직임을 예측하려 했지만, 짙은 안개는 그녀의 능력을 방해했다. 간헐적으로 보이는 시노부의 그림자는 교묘하게 움직이며 그녀를 농락했다. 그녀는 자신의 환각이 시노부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그때, 아즈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안정하고 미약한 선율이었지만, 점차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 속에서도 굳건함을 찾아갔다. 기타 없이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이전의 몽환적인 연주와는 다른, 슬프고도 애절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노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용기를 내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즈사의 노랫소리가 퍼져나가자, 검은 안개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둔해지는 듯했다. 환각의 효과 또한 약해지는 것 같았다. 미코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집중하여 전격을 방출했다. 그녀의 공격은 이전보다 더 정확하고 파괴적으로 시노부를 향했다. 아즈사의 노래가 마치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크롬 도쿠로 역시 아즈사의 노랫소리에 힘을 얻은 듯, 더욱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시노부에게 달려들었다. 환각과 삼지창을 이용한 그녀의 공격은 더욱 위협적으로 변모했다. 그녀는 비록 환각이 약해졌지만, 아즈사의 노래가 만들어낸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고 시노부에게 접근했다.

시노부는 예상치 못한 아즈사의 노래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흥, 꼬맹이 주제에… 거슬려."

아즈사의 애절한 선율은 시노부의 검은 안개를 조금씩 약화시키고 있었다. 미코토의 맹렬한 전격은 빈틈을 노려 시노부를 압박했고, 크롬 도쿠로는 환각과 삼지창을 휘두르며 끈질기게 맞섰다. 마요이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도, 동료들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폐허의 어둠을 가르는 섬광과 함께 섬뜩한 기세가 골목길을 덮쳐왔다. 마치 칼날과 같은 냉랭한 기운이 순식간에 싸움터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건…?"

미코토는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 주변을 경계했다. 시노부 역시 흘러나오던 검은 안개를 거두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섬광이 터져 나온 곳을 응시했다. 크롬 도쿠로는 더욱 굳건히 삼지창을 쥐었고, 아즈사의 노랫소리는 불안하게 떨렸다. 마요이는 작은 몸을 더욱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섬광이 걷히자, 그 자리에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 차갑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 그리고 온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는 마치 어둠 속에서 벼려진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그의 손에는 섬뜩한 냉기를 뿜어내는 두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는 숨을 삼켰다.

"…인류…의… 적…?"

그의 모습을 알아본 듯, 시노부는 낮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에는 이전의 능글맞음 대신 경계와 희미한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어째서 이런 곳에 '인류의 적'이라 불리는 존재가 나타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싸우고 있는 소녀들과 몽환적인 존재를 차가운 눈으로 번갈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스치는 순간, 마치 무거운 쇠붙이에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이 모두를 덮쳐왔다. 특히 아즈사는 그의 차가운 시선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거슬린다."

낮고 간결한 그의 목소리가 폐허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속도로, 두 자루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단순한 공격이 아닌, 불필요한 모든 것을 잘라내는 듯한 섬뜩한 효율성을 담고 있었다.

가장 먼저 공격을 감행한 것은 시노부였다. 그는 재빠르게 검은 안개를 펼쳐 남자의 움직임을 방해하려 했지만, 남자의 검은 안개를 베어 가르며 멈추지 않았다. 몽환의 안개는 힘없이 갈라지고 흩어졌고, 시노부는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의 검날에 스쳐 쓰러졌다. 붉은 피가 검은 안개 위로 흩뿌려졌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이토록 쉽게 파훼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크윽…!"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시노부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몸 주변으로 피어오르던 몽환적인 기운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남자를 노려보며 마지막 힘을 짜내려 했지만, 이미 그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음 순간, 남자의 시선은 크롬 도쿠로에게 향했다. 그녀가 펼친 희미한 환각은 남자의 냉철한 눈빛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고, 크롬 도쿠로는 저항할 틈도 없이 검에 베여나갔다. 그녀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고, 그녀의 몸은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마요이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으려 했다.

"…안 돼…!"

미코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격렬한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 남자를 향해 강력한 전격을 방출했다. 수많은 푸른 번개가 맹렬한 기세로 남자를 덮쳤지만, 남자는 마치 그림자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며 모든 전격을 회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와, 검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녀는 남자의 압도적인 속도와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방해… 하지 마라."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미코토의 귓가에 울렸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차갑고 매정했다. 그는 그녀의 능력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듯, 그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데 그쳤다.

겁에 질린 마요이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흥미가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목적은 싸움을 끝내는 것이었을 뿐, 어린아이를 해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즈사였다. 그녀는 여전히 찢어진 옷을 움켜쥔 채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노랫소리는 이미 멎은 지 오래였다. 남자는 잠시 그녀를 응시했지만, 아무런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눈빛은 마치 벌레를 짓밟는 듯,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아즈사의 가녀린 몸을 베어냈다. 그녀는 작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졌다. 붉은 꽃잎이 흩날리는 듯, 그녀의 몸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그녀의 눈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원망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깊은 슬픔만이 어려 있었다.

단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싸움은 처참하게 끝났다. 몽환의 술사, 전격의 능력자, 환각의 사용자, 그리고 슬픈 노래를 부르던 소녀까지, 모두 남자의 검 앞에서 힘없이 스러졌다. 그들의 짧은 만남과 갈등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남자는 쓰러진 소녀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듯, 그는 검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냈다. 그는 왜 이들이 싸우고 있었는지, 왜 이곳에 모여들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그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들을 제거했을 뿐이었다.

폐허가 된 골목길에는 짙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흩어진 붉은 피와 부서진 꿈들만이, 이곳에서 벌어졌던 격렬한 싸움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엇갈린 길에서 만난 소녀들의 끝나지 않던 싸움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의 등장으로 너무나도 허무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스러진 별빛은 다시는 밝게 빛나지 못할 것처럼, 어둠 속으로 깊이 잠겨들었다. 오직 홀로 남은 마요이만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 낯선 장소와 갑작스러운 비극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악몽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