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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반격태세: 경상좌도 (1)
이 글은 흔히 전해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육군은 일본군에게 마냥 쳐발렸다.'라는 인식을 재고해보기 위해 당시 초반 최대의 격전지였던 경상좌도의 조선군 태세를 알아보는 글이다. 먼저 침공 초기 조선군의 움직임을 보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조선군은 제승방략 체제의 허점으로 인해 제대로 집결하지도 못한 채 삽시간에 무너졌을까? 정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임진왜란의 시작은 일본군 제1번대가 1592년 4월 13일 부산 진포에 대대적으로 상륙하면서 시작된다. 그 이후로 이어진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산진성, 동래성 전투다. 부산진성 전투는 일본군이 상륙을 개시한 바로 다음 날인 4월 14일에 벌어졌고, 동래성 전투 또한 바로 이어서 4월 15일에 벌어졌다. 헌데 이미 당시 동래성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수의 동원령을 받은 경상좌도 각지의 군사들이 집결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경상좌병사 이각, 양산 군수 조영규와 울산 군수 이언성 등이 이미 동원령을 받자마자 집결을 개시하여 동래성에 진을 친 상태였고 이어서 동원령을 받고 동래성을 향해 달려오는 군세들도 상당수 있었다. 밀양부사 박진, 경주판관 박의장 등이 동래성을 향해 달려가는 등 경상좌도 일대 13개 읍의 군사가 재빠르게 동래성으로 집결을 개시한다. 이를 보면 흔히 알려진 '병사들이 모여도 지휘관이 없어 와해되었다.'라는 인식과는 조선군의 움직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적의 침공 이틀 만에 관찰사의 지휘 하에 각지의 조선군 및 그 지휘관들이 신속하게 기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럼 이런 신속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왜 조선군은 그렇게 쉽게 와해되었을까? 답은 위의 이 이각이라는 놈이다. 경상좌병사로서 집결한 경상좌도 조선군을 총지휘해야 했던 이각은 동래성 전투에서부터 성 밖의 조선군 상당수를 지휘하고 있다 고대로 줄행랑을 쳐버린다. 그렇게 동래성에 빠르게 집결했던 조선군은 박살이 나고 성은 혈전 끝에 함락 당하고 만다. 이각의 추태는 경상좌도 전역 내내 그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데, 동래성에서 박살 난 조선군이 단숨에 와해된 것 또한 아니었다. 약 나흘 후 4월 18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 제2번대는 고대로 언양, 양산 방면으로 북진하여 경상좌도 조선군의 본영인 울산에 위치한 경상좌병영을 노린다. 이때 경상좌병영에는 동래성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조선군이 대대적으로 집결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도 총지휘관인 이각이 먼저 도망을 쳐버린다.(...) 결국 4월 20일 경상좌병영마저 일본군에게 함락. 이번에도 경상좌병영을 지원하기 위해 좌도 각지에서 이동 중이던 조선군 후발부대들은 전투에 참전해보지도 못하고 다시 임지로 회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니까 경상도의 초기 전황을 보면 조선군은 제승방략 체제의 허점으로 인해 느릿느릿 움직이다 억하고 다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각지의 현장 지휘관들은 상황이 터지자마자 기민함 움직임으로 병력을 결집하여 전장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정작 중앙 지휘부가 고위 지휘관들의 추태로 인해 먼저 무너지면서 병력들이 붕 떠버리는 사태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군은 손쉽게 북진을 개시하면서 연달아 상륙한 후속부대들의 힘을 받아 쭉쭉 치고 올라간다. 곧바로 경상도의 중심도시인 경주가 떨어졌고 이어서 영천성, 상주성이 넘어가면서 일본군은 손쉽게 경상도의 방어선을 분쇄한 채 서울을 향해 내달릴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중간이 어찌되었든 우리가 흔히 아는 임진왜란의 그림이 그려진다. 일본군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허약한 조선군을 모조리 격파하면서 종횡무진 달려나가고 경상도는 순식간에 적의 손에 떨어졌다. 헌데 그게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조선군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거든. 어찌되었든 주요 고위지휘관들의 추태와 함께 중앙지휘부가 날아가면서 경상좌도의 조선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1592년 4월 말부터 5월 약 한 달 동안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일본군 각 대가 순차적으로 상륙하면서 경상좌도 전역을 유린하다시피 했고 거기에 국가의 통제를 잃어버린 난민들 또한 도적떼로 화해 경상도 전체를 휩쓸었다. 이 중에서는 아예 일본군 밑에 붙어서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 주변 일대를 휩쓸던 대규모 반적 집단들까지 있었다고 하니 사실상 판이 다 박살이 나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거의 잔당 토벌전 정도로 마무리될 그림이었는데.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경상좌도의 조선군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각 지역에 배치된 하급 지방관들인 '현령'의 존재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이 작은 마을의 '사또나리'들이 죽음으로 버티고 섰다. 군수급도 되지 않는 작은 고을들에 파견되는 현령, 현감들이 도망치기는 커.녕 경상좌도 북부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장 경주지역만 보아도 경주부윤과 판관을 비롯하여 흥해 군수와 장기 현감, 영일 현감, 청하 현감 등이 각지에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책임 지역을 방어하기 시작한다. 특히 죽장현에 주둔한 경주 판관 박의장은 흩어진 난민과 군사들을 재결집하는 것은 물론, 장인들을 모아 병기고까지 운영하면서 병장기를 자체 제조하여 분배했다. 여기에 힘을 입은 경주지역 여러 현령들은 제각기 병력을 끌어모아 주요 고지와 통로들에 복병을 배치하여 일본군 소부대들을 차단하거나 배후 공격에 나섰고, 밤에는 서로 간의 소통을 위해 봉화를 올리고 낮에는 적의 주요 진지들을 향해서도 소규모 공격을 감행하는 듯 아주 주야로 발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이들 현령들의 움직임은 시작부터 아주 조직적이었는데, 경상좌도의 조선군이 가장 먼저 들이쳐서 차지한 곳들이 바로 죽장창과 기계창이었다. 당시 경주부 일대에는 조세미를 대량으로 보관하는 조세창이 총 4곳 위치하고 있었는데, 바로 신광창․기계창․죽장창․안강창 이 네 곳이었다. 재집결하기 시작한 조선군은 곧바로 이들 조세창을 먼저 차지한 것이다. 앞으로 군대를 운용할 보급창을 가장 먼저 확보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경주부와 북쪽으로 맞닿은 안동진 쪽에서는 조선군의 움직임이 더욱 과감했다. 이 지역 현령들은 이미 안동진을 뚫고 올라가 강원도 남부 지역까지 차지한 일본군과 서쪽의 상주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군 남부 주둔군 등으로 둘러싸인 형상이었는데, 이쪽 현령들은 정말로 죽기로 자신의 책임 지역을 지키기 위헤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영해 부사와 청송 부사, 영천 군수, 의성 현령, 봉화 현감, 진보 현감, 군위 현감, 예안 현감, 영덕 현령, 용궁 현감 등 각 지역의 현령들이 모두 일본군에 맞서 깨지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혈전을 벌였고 개중에 용궁 현감이었던 우복룡을 중심으로는 주변 지역의 현령, 현감들이 군세를 합쳐 일본군을 향해 공세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렇게 들이받았던 조선군은 당시만 해도 엄청난 기세였던 일본군 주력부대 앞에 박살이 나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흩어져 도망하기는 커.녕 다시 임지로 후퇴하여 병력을 모아 들이받기를 반복할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을 이어나갔다. 남부의 대구진 지역에서도 전투는 지속되어 대구 부사를 비롯하여 청도 군수와 경산 현령, 인동 현감, 현풍 현감, 영산 현감 등이 모두 군사를 이끌어 적과 대진했고, 현풍 현감, 영산 현감들은 아예 순절하는 등 조선의 하급 수령들은 너나 없이 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A 훈련봉사 권응수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는데, 그의 관할 하에 응모한 자들은 모두 한때 무사들로서 영천에 사는 정대임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니, 사로잡거나 참한 자가 자못 많았다. B 영천군에 가까운 면의 군인 100여명이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모였거늘 같은 군에 거주하는 의병장 정대임이 병사를 모아 거듭하여 서로 통하였습니다. C 영천 복병장 정대임과 하양 신해와 의흥 복병장 홍천뢰와 경주 임내와 자인현 복병장 등이 있는 곳에 군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D (8월 1일)경상도 영천 진사 정세아, 신녕 봉사 권응수, 하양 봉사 신해, 고성 봉사 최강이 모두 모병하여 적(일본군)을 토벌하였다. 세아의 나이 67세였다. 적이 막 본성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세아가 좌수 유몽서, 생원 조희익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들을 초집하여 적을 사로잡아 참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러한 각 지역 현령들의 피나는 분투와 희생 속에 경상좌도의 군민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패퇴하여 숨어있던 지방의 산졸들과 지역 유력자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의병들이 우후죽순 솟아나기 시작한 것. 이들 의병 전력은 곧바로 각 지역 현령들이 이끌고 있던 관군과 긴밀하게 유대하며 점차 전력을 합쳐나가기 시작했는데, 사태는 이미 일본군이 꿈꿨던 손쉬운 잔적 토벌을 훨씬 넘어서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개전 2개월차인 6월에 이르면 이미 경상도는 아주 사방에서 난전이 펼쳐지는 격전장이 된다. 경상북도 라인의 경주부를 중심으로 좌도의 조선군 움직임이 격렬해짐과 동시에 경상우도의 조선군 또한 5월부터 초유사 김성일을 필두로 전력을 회복하며 진주성의 김시민을 선봉 삼아 경상남도 라인인 창녕, 밀양, 진해, 창원 등지로 공세를 반복해오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군은 사정이 많이 다급해진다. 주요 후방 기지인 경상도가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면 이를 보급선으로 발판 삼아 이미 전방으로 쭉쭉 뻗어 올라간 전방부대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기 때문. 6월부터 경상도 주둔 일본군은 경상북도 라인의 조선군을 철거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하게 되고 경상좌도 조선군에게는 최대의 위기가 펼쳐진다. 아직까지 각 고을 현령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조직화되지 못한 상태로 중앙지휘부가 여전히 텅 비어있는 상태였기 때문. 그런 상황에서 딱 한 명이 흐름을 아주 틀어 놓게 되는데 그게 바로 '경상좌병사 박진'의 등장이다. - dc official App-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반격태세: 경상좌도 (2)밀양 부사 박진은 전쟁 초기부터 밀고 들어오는 일본군을 맞아 여러 지역에서 분투를 벌였던 인물인데, 이 시점에 이르러 공을 인정 받아 1592년 5월 경 '경상좌병사'로 발령이 난다. 드디어 초장의 혼란상 끝에 경상좌도 조선군에 '지휘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밀양 지역에서 유격전을 거듭하고 있던 박진은 발령장을 받자마자 소수의 군사만 이끌고서 재빨리 북상하는데, 이는 당시 경상좌도의 최대 화약고이자 조선군의 근거지였던 경상북도 라인을 규합하기 위함이었다. 본진을 안동진 지역으로 삼음과 동시에 박진은 이동하면서도 경상좌도 각 지역에 공문을 뿌리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는데, 바로 좌도 각지의 조선군은 현재 상태를 상세히 보고함과 동시에 본진인 안동 지역으로 최대한 집결하라는 명령서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개전 2개월 차인 6월부터 경상도 주둔 일본군은 경상북도 라인을 향한 맹렬한 공세를 감행한다. 경상좌도 전체의 상황이 완전히 난투전으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주요 보급선인 경상도 경주/상주 라인을 사수하고 조선군을 완전히 경상도에서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이미 6월 5일에 경상좌도 용궁현을 향해 대규모 일본군이 공세를 감행해 각 지역 현령들이 죽자사자 맞서 싸우고 있었으며, 북부에서도 일본군의 호응이 있어 강원도 남부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대거 남하해 경상북도 라인을 아래위로 조여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당장 6월 22일에 이르면 일본군의 대공세로 그동안 사수해오던 안동, 예안현 등지가 적에게 침탈 당하면서 불바다가 되었다. 조선군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아서 격전지인 안동현을 중심으로 예안 현감 신지제와 용궁 현감 우복룡 등이 반격에 나섰고 또한 영해 부사 한효순이 장기 현감 이수일, 영일 현감 홍창세, 흥해 군수 최보신, 청하 현감 정응성, 영덕 현령 안진 등과 합세하여 일본군에 공세를 감행했다. 때문에 안동현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서는 6월 내내 조선군과 일본군이 뒤섞여 아주 죽고 죽이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격전지 한가운데로 향한 박진은 마침내 6월 22일 안동 지역에 일대의 의병, 관군 전력을 결집하여 경상좌병영을 재조직하게 된다. 그 즉시 영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의병대장 권응수가 일대의 의병전력 전체를 이끌고 박진의 휘하로 들어왔고 다른 조선군에게도 통지가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초반 박진의 병력 결집시도는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 또한 역시나 X맨 한 놈 때문이었다. 이각 이 머저리가 도망가면서 경상좌병사의 직인을 함께 들고 가버린 것.(...) 당시 조선군은 각 지역 사령관의 직인이 매우 중요한 군권행사의 도구였는데, 중앙 조정의 공인을 받은 이 병사의 직인이 있어야 공문을 보내 지역의 병력을 지휘할 권한이 생기는 보안체제였다. 헌데 이 직인이 없으니 막 경상좌병사에 부임한 박진이 각 지역 현령들에게 '집결하라.'하고 명령을 보내도 현령들이 오히려 혼란에 빠져서 명령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병사의 직인도 없는 작자가 경상좌병사를 자처하면서 감히 군사를 휘하에 끌어모으려고 시도해? 이거 완전 역적 아니야? 이런 혼란상은 박진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영해 부사 한효순이 자신의 명망으로 대신하여 극복하게 된다. 자신의 직인을 대신 내주어 그것으로 현령들을 설득한 것이다. 위기를 넘긴 박진은 신속한 일처리 실력을 선보이는데, 7월 5일 곧바로 휘하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권응수를 신녕과 영천 지역으로 다시 파견조치한 것이다. 원래부터 영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오던 권응수를 다시 되돌려보낸 것인데, 이 때문에 기존에는 '임진왜란 당시 관군과 의병은 반목했다.'라는 사관에 따라 권응수와 박진의 사이가 틀어져서 권응수의 병력이 좌병영을 일시 이탈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반목이 있었다면 이후 박진과 권응수의 사이가 적잖이 틀어져야 했을 것인데, 이후로 권응수는 아예 박진의 오른팔 격으로 중용된다. 따라서 오히려 박진의 지시에 따라 권응수가 움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요즘의 시각이라고 하겠다. 영천 지역으로 재남하한 권응수의 병력은 거기서 추가로 하양 등지의 병력을 결집하여 신녕 쪽에서부터 북상해오던 일본군을 막아세운다. 이 전투에서 북상하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복병에 당해 박살이 나 북도 라인 진출이 좌절된다. 당시 이미 불바다가 되어버린 안동 지역을 평정하는 데 병력을 집중해야 했던 박진이 후방에서 올라오는 적의 움직임을 권응수를 통해 미리 차단하고자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군은 이에 성공했다. 여기서 밀리고 있던 안동 지역의 전세도 그 흐름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곧바로 좌병영 전체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한 박진은 청송, 진보 등지에서 병력을 계속해서 끌어모았고, 이윽고 안동부에 진입하여 안동진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몰아내고 수복하는 기염을 토한다. 마침내 이 곳에서 박진은 안집사 김륵에게서 안동진의 군정권을 정식으로 넘겨받아 경상좌병사로서의 위엄을 오롯이 갖추게 된다. 거기에 안동부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경상좌도군은 화포를 동원한 포격전까지 벌였는데, 이는 안동진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청송과 진보 일대의 병기창을 통해 조선군이 화기까지도 상당수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러모로 조선군에게는 반전의 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후 박진은 일본군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화기를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안동부 지역을 일시에 수복한 박진의 다음 목표는 이제 강원도에서부터 남으로 치고 내려오는 일본군이었다. 이어진 7월 내내 안동부에서 북상한 조선군 여러 부대들이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남하하는 길목들을 착착 막아 세웠고 거기서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대치를 이어간다. 결국 경상북도 라인을 거점으로 세를 불려가던 경상좌도의 조선군을 일망타진하려던 일본군의 남북 조이기 전략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는 마침내 조선군에게 반격의 때가 돌아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제 경상북도 라인의 조선군과 일본군 전력비는 완전히 뒤집어져서 경주/영천/상주 라인의 주성들을 점거하면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역으로 남북의 구원군이 모두 끊기면서 주변 지역의 조선군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형세가 되었다. 그 상태가 오죽할 정도였으면 7월 중순 쯤 영해 부사에서 경상좌도순찰사로 승진한 한효순이 아예 화려한 의장대열을 꾸려 경북 각 지역을 돌면서 행차를 벌였는데, 조선군민들이 온통 달려나와 축하하며 잔치를 벌였고 그걸 바로 성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일본군들이 아무 것도 못한 채 손을 놓고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저 멀리 북방으로 몽진한 중앙 조정으로부터도 희소식이 들려왔다. 대명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곧장 경상좌도 조선군의 반격작전에 불이 붙게 된다. 조정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하삼도의 군사는 떨쳐 일어나 적을 요격하라.' 드디어 각 지역 단위의 거점 방어전에서 조직적이고 집중적인 공세 탈환전이 전개된 것이다. 경상좌도 조선군의 첫 목표는 바로 일본군의 최중요 보급선이었던 부산-상주 라인을 중간에서 이어주고 있던 영천성이었다. 당시 영천성은 서쪽으로는 충청도로 넘어가는 상주와 낙동강 수운선, 동쪽으로는 경상좌도의 중심지인 경주를 끼고 있는 물류허브와도 같은 지리를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조선군이 경상북도 라인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 주둔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찔러야 하는 급소였다. 7월 23일, 경상좌병사 박진은 영천 일대로 진출한 휘하 병력 전체를 하나의 군세로 재조직하여 '창의정용군'을 창설한다. 마침내 개전 3개월 만에 산산이 흩어졌던 경상좌도 조선군이 각 지역 단위의 개별 부대가 아니라 하나의 집중된 군세로 재조직된 것이다. 그 규모는 대략 4천. 실 동원 병력은 4천을 훨씬 웃도는 수준으로, 박진의 명을 받고 진공 중에도 지속적으로 병력들이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수개월 간의 혼란한 난전상을 거쳐 이미 각 성과 진에 주둔한 규모도 1천 여에 머무를 정도로 저하된 일본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7월 26일 새벽 조선군의 포격으로 시작된 영천성 전투는 7월 28일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다. 성 밖에서 최초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위세에 눌려 성 내로 패퇴하였고, 그대로 성을 겹겹이 포위한 조선군은 무려 정면 공세를 감행하여 성문까지 뚫고 성내로 난입해 백병전을 벌였다. 앞뒤로 포위된 일본 주둔군은 후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떼몰살 당해 단일 전투에서 조선군이 획득한 일본군 수급이 500여급이 넘어가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경상좌병사 박진이 이끄는 경상좌도 조선군의 전력은 한 달 뒤인 8월 경주성 진공에 이르면 그 규모가 이미 만 단위로 불어나고 있다. 당연히 경상도 각 거점을 향해 일본군이 어찌 버텨볼 수 없는 조선군 웨이브가 펼쳐졌고 임진년 당년이 다 가기도 전에 일본군은 경상북도 상주/경주 라인을 완전히 상실하고 낙동강 수운선까지 조선군이 남하하여 전체 보급선 자체가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이렇듯 개전 후 반 년, 그것도 조선이 전란 내내 가장 벼랑 끝까지 밀려난 상태였다는 임진년 당년 경상좌도에서 오히려 조선군의 분투는 눈이 부실 정도로 결연했다. 무엇보다 대단한 직위랄 것도 없었던 일개 고을의 현령, 현감들이 자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임지를 사수하려 나섰고 이에 군민이 결정적으로 호응하여 반격을 이끌게 되었다는 점은 당시 조선이 가진 강점을 제대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수십 만 날랜 적병의 급습을 받아도 당시 조선은 이미 그 정도로 쉽게 무너질 체급과 체제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경상도에 주둔한 일본군 주력부대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만다. 초반에 가장 먼저 밀어버린 경상좌도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조선군 전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인가? 결국 이들이 머리를 굴려 뽑아낸 답은 엉뚱한 데 있었으니, '어딘가 조선군의 소굴이 따로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남부 지방 조선군의 소굴'로 지목된 것이 남강을 끼고서 전라도로 향하는 길을 막아세우며 경상좌도와 우도를 이어주던 한 성이었다. 그렇게 개전 초기 수개월 간 펼쳐진 경상좌도 조선군의 피눈물 나는 저항이 경상우도의 조선군에게는 다시 없을 소중한 시간을 벌어 주었으니. 수만의 적이 누차 이긴 기세를 바탕으로 죽기를 기약하고 성을 함락시키려 하므로 위태로움이 조석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시민(金時敏)이 수천 명의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홀로 성을 보전하여 한 도의 이미 저상(沮喪)되었던 인심을 분연히 흥기시켰습니다. 진주(晉州)의 성이 포위되었을 때에 힘써 장사(將士)들이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적을 물리치고 성을 안전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제서야 비로소 성지(城池)에서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공이 지극히 큽니다.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고을의 날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김시민과 함께 군주의 성을 지켰는데, 8일에 김시민이 ‘아마도 성을 온전하게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몰래 수문(水門)을 열어서 노약자(老弱者)를 내보내야겠다.’고 하자, 이광악이 ‘이와 같이 하면 군사들의 마음이 크게 변하여 성을 수호할 수 없다.’고 하면서 큰소리로 말렸으며, 김시민이 탄환에 맞은 뒤에는 혼자 한 모퉁이를 담당하여 왜적을 쏘아 죽이고 마침내 적을 물리쳐 성을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판관(判官) 성수경(成受慶)은 적이 성에 오를 도구를 많이 준비하여 처음부터 동문(東門)을 오로지 공격하였지만, 밤낮 5일 동안 굳게 지키면서 용맹을 떨치며 혈전(血戰)하여 무수히 적을 살해하여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성을 완전하게 하였습니다. 수성 대장(守城代將) 최덕량(崔德良)은 적이 불의에 옛 북문에 충돌하니, 군사들이 도망하여 흩어지매 적이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성에 기어올라 성의 함락이 순간에 달려 있었는데, 최덕량이 이눌(李訥) 등과 함께 도망하는 군졸 몇 사람을 베어 죽이자, 군사들이 그제야 다시 모여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을 떨치며 힘껏 싸워 마침내 한 성을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율포 권관(栗浦權管) 이찬종(李纘宗)은, 적이 본 고을을 포위하려 할 때 사람들이 모두 ‘성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죽는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전 우후(虞候) 이협(李浹)은 성문(城門)에 이르렀다가 도망하였지만, 그는 혼자 성으로 들어가 협력하여 남문(南門)을 지켰으니, 난리에 임하여 명령을 받든 것이 매우 가상하며, 거기에다 재주와 국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위급할 때 쓸만합니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하히해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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