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의 북상과 명군의 남하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일본 우군은 전주에서 일본 좌군과 합류한 후 승세를 타고 공주, 진천을 거쳐 북상하고 있었고, 그중 선봉대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직산(충남 천안시 직산읍)까지 당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이 다시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자 일부 백성들은 피난을 갔으며, 조정에서는 또다시 파천(수도를 옮김)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평양에 머물던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여러 차례 출병을 간청하였고, 양호는 날랜 기병을 선발하여 부총병 해생을 비롯해 참장 양등산, 유격장 우백영과 파귀 등에게 군사 2천을 보내 남진하게 하였습니다.

명나라 경리 양호(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유격장 파새가 정병 2,000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습니다.
| 직산 전투
9월 7일, 동이 틀 무렵, 명군은 직산 북쪽의 소사평에서 북상 중이던 구로다 나가마사의 5천 군사와 맞닥뜨려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명군의 지휘관인 부총병 해생은 군사를 좌군·우군·중군의 셋으로 나누어 일본군을 공격할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명군이 진격하던 중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았고, 명군은 이들을 조선의 양민으로 착각하여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백의를 즐겨입는 조선 백성들(동학농민운동 민족기록화(출처 : 독립기념관))
하지만 이들은 조선의 양민이 아닌 일본군이었고, 이들은 명군을 향해 조총을 쏘아댔습니다.
이에 명군은 잠시 당황했고, 선봉대 일부가 쓰러졌지만 빠른 기동성을 앞세워 적을 향해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니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단병접전에 강하기로 이름 높았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매복과 기습 작전이 아닌 기병의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탁 트인 평지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유목민족이 다수 포함된 명나라 기병을 당해낼 수 없었고, 전투 중 명군은 전사한 일본군을 적진에 던져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면서 전황을 더욱 유리하게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명군이 일본군을 압도하고 있는 가운데 부총병 해생의 군을 뒤따라오던 유격장 파새가 원병 2,000명을 이끌고 직산에 진입하면서 명군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일본군은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명나라 기병(드라마 임진왜란1592 중에서)
결국, 일본군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조총을 비롯한 다수의 무기를 버린 채 목천현(천안시 동남구 목천읍)과 청주 방면으로 앞다투어 도망쳤습니다.
9월 7일, 여섯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명군은 500~600명의 일본군을 베었고, 수급 30여 개를 취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명군은 곧이어 추격을 단행하려 했으나 매복의 위험과 병력 소모를 우려한 제독 마귀가 너무 깊이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병력을 돌렸다가 길을 나누어 남하하기로 하였습니다.

명나라 제독 마귀 영정(천송림리충무후마귀영정)(출처 : 문화재청)
한편, 전투에서 패한 구로다는 병력을 수습한 뒤 인근 마을의 백성들을 살육하고 약탈하며 분풀이했으나 명군이 남하해올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결국 철수했고, 곧바로 모리 히데모토의 본군에 합류한 후 공주를 거쳐 상주로 후퇴하였습니다.
| 직산 전투의 평가
[선조실록]에는 직산 전투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독 접반사(중국 사신을 수행하며 접대하던 임시 관직) 장운익이 아뢰기를,
직산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 나가 시살하며 한참 동안 교전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은
30여 급을 베었으며
해 부총(부총병 해생)과 양 참정(참장 양등산)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를 드니, 천안의 대군이 즉각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므로 중과부적으로 각자 퇴각하여 지켰는데 해 부총 등 네 장수는 지난밤에 직산을 떠너 올라오고 있으며 중국 병사들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 1597년 9월 9일의 [선조실록]
이 전투에서 명군이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면서 여차하면 조선의 수도 한양까지 재점령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명나라에서는 이 전투를 *임진왜란의 3대전으로 꼽을 정도로 높게 평가했습니다.
* 명나라가 뽑은 임진왜란의 3대전 : 4차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
직산전투
평양성탈환도(4차 평양성 전투)(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또한, 조선의 국왕 선조는 의병과 관군이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이들의 공을 낮추고 명군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이 전투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선조 : 임진왜란이 끝난다면 그것은 오로지 명나라군 덕분이다.\
상(선조)이 말하기를,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
명나라 경리 양호)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 1597년 10월 20일의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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